부활한 전설의 카지노사이트 추천 '르네쌍스'

[arte]이준희의 점입가경(漸入歌景)-노래의 풍경 속으로

작곡가 안기영의
극장과 전시관이 여럿 모여 있는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에는 다른 곳과 성격이 좀 다른 시설이 하나 있다. 드나드는 사람이 많지 않아 언제나 한적한 곳, 디자인미술관 2·3층에 있는 예술기록원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운영하는 예술기록원은 각 예술 분야의 다양한 자료들을 수집·보존하고 관련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일을 해왔는데, 지금도 2층 열람실에서 조촐하지만 의미 있는 전시를 3월 말까지 진행하고 있다. 전설적인 카지노사이트 추천 '르네쌍스'가 이번 전시의 주제다.

당대 제일가는 음반수집가로 꼽혔던 박용찬이 1951년부터 30년 넘게 운영했던 르네쌍스. 누적된 적자로 어려움을 겪다가 1986년에 결국 문을 닫고 말았으나, 르네쌍스의 귀중한 SP음반 자료는 다행히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전신인 한국문화예술진흥원에 모두 기증됐다. 르네쌍스 SP음반 내용 대부분은 외국에서 녹음된 서양 고전카지노사이트 추천이지만, 1910~1940년대 한국 카지노사이트 추천도 일부 포함돼 있다. 이번 전시는 바로 그 한국 SP음반에 초점을 맞췄다.
음반수집가 박용찬이 1987년에 아르코예술기록원(당시, 한국문화예술진흥원 자료관)에 기증한 '르네쌍스' 컬렉션 자료 / 출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그냥 눈으로 보기만 하면 10분도 걸리지 않을 전시에서 관객의 발과 귀를 잡아 두는 곳은 SP음반 소리를 디지털 파일로 만들어 직접 들어 볼 수 있게 제공하는 장소다. '판소리 명창전', '청춘의 조선 양악' 두 주제로 열여덟 곡이 준비돼 있다. 음반이 겪어 온 길고 험난했던 세월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잡음이 다소 부담스럽긴 하지만, 곡마다 깃들어 있는 깊고 흥미로운 이야기는 그런 부담을 많이 덜어 주기도 한다. 두 가지 녹음을 함께 들을 수 있어 특히 눈길을 끄는 &카지노사이트 추천;그리운 강남도 그렇게 이야기가 많은 노래다.

&카지노사이트 추천;그리운 강남은 3월, 정확히 말하면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온다는 음력 3월에 딱 어울리는 곡이다. '정이월 다 가고 삼월이라네' 첫 대목 그대로 1929년 3월에 만들어진 가사는 잡지 &카지노사이트 추천;별건곤 4월호를 통해 발표됐다. 석송이라는 호로 더 잘 알려진 김형원이 가사를 썼고, 거기에 안기영이 곡을 붙여 5월 중 노래가 완성됐다. 두 작가는 앞서 2월에 결성된 조선가요협회 창립 동인으로서 함께 &카지노사이트 추천;그리운 강남을 만들었는데, 이광수를 위시한 문예계 명사들이 대거 참여한 조선가요협회는 '건전한 조선가요의 민중화'를 표방한 단체였다. 당시 지식인들이 생각했던 가요의 개념은 물론 오늘날 대중가요와 전혀 달랐다.
작곡가 안기영 (1931년 촬영) /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완성 이후 5월 말에 조선가요협회 회원들 앞에서 첫 선을 보인 <그리운 강남은 7월 경성방송국 카지노사이트 추천 프로그램을 통해 처음 대중에게 공개됐고, 9월 말 경성공회당에서 열린 카지노사이트 추천회에서도 연주됐다. 조선가요협회에서 만들어낸 노래들 중 설립 취지에 가장 잘 맞는 작품으로 꼽혔던 것이 <그리운 강남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어 11월 말에 간행된 <안기영 작곡집 제1집에도 실려 그의 대표작으로 널리 알려지게 됐는데, <그리운 강남은 사실 안기영의 대표작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첫 작품이기도 했다.
1929년에 간행된 &카지노사이트 추천;안기영 작곡집 제1집&gt; 표지 / 출처.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안기영은 원래 작곡가보단 테너 가수로 유명했던 인물이다. 조선가요협회 참여 당시 작곡부가 아닌 선전부 간사를 맡았던 이유도 그가 그때까지 공개적으로 작곡을 발표한 적이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1910년대 후반 배재고등보통학교, 연희전문학교 학창 시절부터 김인식, 김영환 등 초창기 서양카지노사이트 추천 전문가들에게 카지노사이트 추천을 배운 안기영은, 연희전문학교 재학 중 3·1운동에 참여했다가 체포돼 고초를 당한 뒤 중국으로 건너가 난징에서 고학을 하며 카지노사이트 추천 공부를 계속 했던 것으로 보인다. 기록으로 확인되는 그의 첫 무대가 열린 곳은 1923년 2월 중국 상하이였다. 현지 조선인들의 배움터였던 인성학교 후원을 위한 연주회였다.

상하이 공연 뒤 조선으로 돌아온 안기영은 1923년 10월 서울 종로 YMCA회관에서 열린 연주회에 홍난파, 윤심덕 등 쟁쟁한 카지노사이트 추천가들과 함께 출연했고, 이후 조선을 대표하는 성악가로 성장해 갔다. 그러한 그의 위상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당시 자료로 우선 꼽을 수 있는 것이 음반 녹음이다. 안기영의 첫 음반은 1925년 10월에 발매됐고, 그것은 또 조선 양악 최초의 성악 음반이기도 했다. SP음반 녹음과 발매는 이미 1906년부터 시작됐지만, 수록 내용 대부분은 판소리나 민요 같은 전통카지노사이트 추천이었다. 극소수에 불과한 서양카지노사이트 추천 녹음은 안기영 이전까지 찬송가나 창가, 기생이 부르는 유행가에 머물러 있었다. 조선 제일의 소프라노로 일컬어지며 세상을 뒤흔든 정사(情死)와 유작 <사의 찬미로 기억되는 윤심덕도 첫 음반 발매는 안기영보다 늦은 1926년 2월이었다.

작곡가 안기영의 대표작으로 떠오른 &카지노사이트 추천;그리운 강남도 발표 이후 당연히 음반으로 만들어졌는데, 1931년부터 1943년까지 네 차례나 발매됐다. 1931년 5월에는 안기영이 이끌었던 혼성합창단 성우회의 녹음, 1932년 2월에는 안기영 본인의 녹음, 1934년 5월에는 유행가 가수 김용환·윤건영·왕수복의 녹음, 그리고 1943년 봄에는 소프라노 김천애의 녹음으로 각각 조금씩 다른 &카지노사이트 추천;그리운 강남 음반이 나왔다. 예술기록원 전시에서 들어 볼 수 있는 것은 첫 번째 성우회 녹음과 네 번째 김천애 녹음이다 [음원 듣기].
성우회 녹음의 1931년 &카지노사이트 추천;그리운 강남&gt; 음반 딱지 / 출처. 아르코예술기록원
안기영 녹음의 1932년 &카지노사이트 추천;그리운 강남&gt; 음반 신문 광고 / 출처. 국립중앙도서관
네 가지 &카지노사이트 추천;그리운 강남 녹음은 가창이나 편곡은 물론 가사에도 일부 차이가 있다. 원래 김형원이 &카지노사이트 추천;별건곤에 발표한 가사는 9절이었고, &카지노사이트 추천;안기영 작곡집 제1집에도 9절 가사가 모두 수록됐다. 하지만 한 면 녹음 시간이 3분 30초 안팎인 SP음반에는 가사 전체를 싣는 것이 불가능했으므로, 9절 중 일부만 선택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1931년, 1932년, 1934년 녹음에는 제1·6·7·9 네 절만이 실렸고, 1943년 음반에는 그와 달리 제7절 대신 제2절이 들어갔다. 문제의 제7절은 '그리운 저 강남 두고 못 감은/ 삼천리 물길이 어려움인가/ 이 발목 상한 지 오램이라네'인데, 발목이 상해 이상향 강남으로 갈 수 없다는 표현이 조선의 식민지 상황을 빗댄 것으로 읽힐까 싶은 검열 우려 때문에 빠졌던 것으로 보인다.
김천애 녹음의 1943년 &카지노사이트 추천;그리운 강남&gt; 음반 딱지 / 사진. ⓒ 이준희
이처럼 조선 해방에 대한 은유로 애창되기도 했던 &카지노사이트 추천;그리운 강남은 1945년 광복을 맞아 한 번 더 가사 변화를 겪게 된다. 1946년 2월에 간행된 &카지노사이트 추천;그리운 강남 악보에는 1930년대 녹음과 달리 제1·4·5·6 네 절 가사가 선택돼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이제 해방이 되었으니 그리웠던 이상향 강남과 같은 새로운 세상, 새로운 나라를 함께 일구어 보자는 의지가 느껴진다.정이월 다 가고 삼월이라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면은/ 이 땅에도 또 다시 봄이 온다네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강남을 어서 가세
집집에 옹달샘 저절로 솟고/ 가시보시 맞잡아 즐겨 살으니/ 천년이 하루라 평화하다네
저마다 일하여 제 살이 하고/ 이웃과 이웃이 서로 믿으니/ 빼앗고 다툼이 앳적에 없다네
하늘이 푸르면 나가 일하고/ 별 아래 모이면 노래 부르니/ 이 나라 이름이 강남이라네
1946년 &카지노사이트 추천;그리운 강남&gt; 악보 표지 / 사진. ⓒ 이준희
광복 분위기가 짙게 반영된 새로운 &카지노사이트 추천;그리운 강남은 안기영 개인에게도 각별한 의미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이자 조선 제일의 테너, 그리고 인기 작곡가로도 활동하던 1933년 4월, 그는 돌이키기 어려운 인생의 오점을 남겼다. 제자 김현순과 사랑에 빠져 처자식을 버리고 돌연 자취를 감춰 버렸던 것이다. 하얼빈, 베이징, 상하이, 도쿄를 떠돌다 1936년 3월에야 돌아온 안기영은 이제 스캔들이 나기 전과 같이 당당한 활동을 하기가 어려웠다. 당시 언론에서는 그를 두고 '도색가인(桃色歌人)'이라고 비꼬기까지 했다. 그렇게 오랫동안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던 안기영에게 해방으로 세상이 갑자기 뒤바뀐 상황은 어떤 기회, 돌파구로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안기영의 의욕, 새로 다듬어진 &카지노사이트 추천;그리운 강남은 해방과 함께 닥친 분단이라는 거대한 시대의 덫에 걸려 꺾이고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남북이 갈리고 좌우가 대립하는 혼란 속에 안기영은 정치적으로 중도좌파 입장에 섰고, 그것은 1950년 6월 전쟁이 발발한 뒤 서울에 머물러 있다가 1950년 9월 퇴각하는 북한군과 함께 북으로 가는 선택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한때 도색가인이라 불렸던 안기영은 이제 그보다 더 심각하고 위험한 '적색가인'이 돼 버렸고, 월북 딱지가 붙게 된 그의 작품 또한 온전할 수가 없었다. 1951년 10월에 안기영이 'B급 월북작가'로 지목된 데 이어, 1952년 10월에는 &카지노사이트 추천;그리운 강남도 공식 금지곡이 되어 버렸다.

&카지노사이트 추천;그리운 강남을 다시 듣고 부를 수 있게 된 때는 그로부터 36년이 지난 1988년 10월이다. 안기영은 1980년 8월 북한에서 여든 나이로 세상을 떠났고, 환갑이 거의 다 된 &카지노사이트 추천;그리운 강남도 많은 이들에게 다소 생소한 노래가 됐다. 시간이 흐르고 망각이 작동하면서 애증과 갈등의 도색과 적색은 많이 흐릿해졌으니, &카지노사이트 추천;그리운 강남도 이제 다른 빛깔을 입고 예전처럼 친근한 노래로 돌아오기를 바란다. 화창하고 온화하며 평화로운, 봄날 화색(和色)의 노래로.이준희 카지노사이트 추천평론가

[ ♪ 장사익 - 그리운 강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