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계단은 어떻게 카지노 입플 되는가

[arte] 박정민의 열린 카지노 입플과 사유들

영화 속 명장면이 된 카지노 입플
서울은 어떻게 카지노 입플를 가질 수 있을까
영화가 거울로서 기능한다는 이론을 입증하기 위함인지 영화에는 관객이 앉아 있는 공간, 점진적으로 높아지는 그 구조를 거울처럼 반영한 공간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 장면들은 영화사(史)를 하나의 공간적 구조로 펼쳐놓는다면 꽤 높은 곳에 자리 잡을 것이다. 몰래 궁을 빠져나와 그 카지노 입플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공주, 링 위에서 승리를 꿈꾸며 그 카지노 입플에서 스트레이트 내뻗는 복서, 영화학도들의 교과서가 되어버린 그 카지노 입플 위로 덜컥거리며 미끄러진 유모차는 지난 100년간 사람들의 눈앞에서 몇 번이나 미끄러졌을까?
영화 <전함 포템킨>(1925) 스틸컷. 오데사 카지노 입플에서 유모차가 굴러 내려가는 장면 / 출처. IMDb
영화가 무의식이나 페르소나의 반영이라는 이 이론은 더 이상 잘 언급되지 않는다. 내 생각에 그건 거울로서 기능하는 것이 영화가 아니라 오히려 관객이기 때문인 것 같다. 관객은 자신이 스크린에서 본 인물의 시간을 복제한다. 그리고 그 시간을 복제하기 위해 실제 그 카지노 입플에 방문해야 한다. 그 사건이 일어난 그 장소에 가서 같은 동작을 취해야만 한다. 물론 너무 많은 복제는 때때로 그것을 불가능하게 만들기도 한다.그들의 계단은 오르고 내리는 곳이 아니다. 목적지에 다다르기 위해 그저 경유할 뿐인, 그 과정에서 소요된 시간은 길바닥으로 흩뿌려진 것이고, 소진된 육체의 에너지는 허비되어 버린 곳이 아니다. 오히려 그 시간과 에너지를 마음껏 소진해 버려야 하는 곳이다. 그곳에 부여된 기능을 거부하고, 이곳은 머무르는 곳이라고 선언하는 것, 그런 암묵적 합의를 공유한 사람들이 마치 스크린 속의 얼굴과 공간들 또 움직임들을 바라보듯 눈앞에서 펼쳐지는 그 무작위하고 우연한 드라마에 시선을 고정하는 곳이다. 그들의 계단은 카지노 입플이며 동시에 객석이다. 모여들고, 만나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싸우고, 살고 죽는 모든 드라마가 일어나는 곳이다.

그들이 카지노 입플를 만드는 방법

그들의 카지노 입플이 특별하다고 처음 느꼈던 건 오스트리아의 빈에 방문했을 때였다. 이곳에 가게 된 건 순전히 거울로서 기능하며 <비포 선라이즈의 제시와 소피의 발자취를 반영하기 위함이었다. 돌이켜보면 부끄러워지는 순간도 있다. 영화가 개봉한 지 20년이 다 돼어서였을까? 혹은 그런 영화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수많은 이미지를 창조한 예술가들의 나라였기 때문일까? 영화에 등장한 장소들을 방문했을 때 사람들은 그 장소에 무관심했다. 하지만 그 덕분인지 이 도시가 내게 남긴 잔상은 길게 이어졌다.
영화 &lt;비포 선라이즈&gt; 촬영지인 오스트리아 빈의 '카페 스펠' / 사진. © 박정민
이곳을 방문하기 전 나는 유럽의 그 낡은 도시들이 잃어버린 시간 속을 떠도는 유령에 대한 향수로 지나친 지위를 얻고 있다고 생각했다. 난 콘크리트의 거친 표면이 담아내는 빛과 그림자의 대비에 더 마음이 동하는 이상한 뇌 구조를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이 도시에는 그 특유의 무관심함, 다른 문화권에서는 특정 시대의 상징으로 여겨지는 지위를 가진 성당이나 오페라 하우스나 미술관 등을 그저 자신들의 동네 공원쯤으로 여기는 듯한 '이거 말이야.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야’라고 말하는 듯한 그 무관심함이 오히려 그 섬세한 장인의 망치질과 긴 세월의 세공을 받아낸 석재들이 전해주는 오묘한 감정을 오랫동안 담아두도록 해준 것 같다.

영화에서 제시와 소피는 여러 곳을 스쳐 지나가는데 그중 하나가 벨베데레 궁전이다. 그들이 스쳐 지나간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로크 양식의 이 궁전은 르네상스의 특징인 광장을 향해 열려있는 그런 카지노 입플을 갖고 있지 않다. 넓은 정원도 외벽에 둘러싸여 있고, 그 카지노 입플도 성안에 있다. 그림들이 전시된 방은 어느 쪽에서든 자연광이 스며들어오고, 벽에 칠해진 따스한 도료의 질감이 그 빛을 머금는다. 그래서 그림들을 바라볼 때 미술관이 아니라 귀족의 성에 방문해서 그의 소장품을 둘러보는 느낌을 준다.

그런데 계단 공간은 어두웠다. 계단참에는 검은 격자 프레임의 수직적 창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창은 남쪽을 면하고 있다. 해가 가장 높은 시간에 그 격자 프레임에 쪼개진 빛이 공기 중을 떠도는 먼지를 만나 질감을 드러내면 그 한가운데로 부티크에서 한땀 한땀 만든 드레스를 입은 부인이나 공주가 내려오는 카지노 입플였던 것일까?
벨베데레 궁전의 카지노 입플 / 사진. © Jorge Royan / http://www.royan.com.ar / CC BY-SA 3.0
그때 이 공간을 카지노 입플로 만들고 있는 것은 그 공주나 부인이 아닌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이었다. 높은 층고의 한쪽 벽면 전체에 빛을 반사하지 않는 검은 도료가 칠해져 있고, 집중형 조명이 오로지 이 그림 하나만을 위해 존재했다. 그래서 처음 이 공간에 들어섰을 때는 그림 전체가 스스로 빛을 내는 듯했다. 천천히 바라보고 난 뒤에야 그 빛은 인공광을 그림에 있는 금박이 반사하는 것일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됐다. 외부로 열린 창도 거의 없어 자연광이 제한된 이 공간은 이 그림 하나를 위한 카지노 입플였다.

아 이 사람들은 정말 이걸 오래 해왔구나. 이렇게 빛과 그림자의 대비로 무언가가 실제보다 더 빛나 보이도록 하는 일. 하지만 그 빛남은, 또 그 카지노 입플는 주로 왕족이나 귀족을 위한 것이었을 테다. 어쩌면 그들이 그 계단에 앉아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은 전통적 권력을 형상화한 공간의 기능을 거부함으로써 그 권위에 대한 해방감을 느끼는 것일까?

속도와 카지노 입플 지각의 상관관계건축가 루이스 칸은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거리이며 거리는 합의에 의한 커뮤니티 룸'이라고 했다고 한다. 또 '거리(streets)는 더 이상 없고, 오로지 도로(roads)만 존재한다'라고도 말했는데 그 이유가 집들과 무관한 움직임들만 거리에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저서를 거의 남기지 않은 건축가인데다 시적 표현이 많은 사람이어서인지 단번에 그 의도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와 거의 같은 방식으로 길과 도로를 적대적 위상에 떨어뜨려 놓은 밀란 쿤데라의 소설 <불멸의 한 문장은 루이스 칸이 말한 것을 문학적으로 지각하도록 도와준다.

'도로 그 자체는 아무 의미도 없다. 그저 두 지점을 연결해 준다는 의미뿐이다. 길은 카지노 입플에 대한 경의다. 길 한 토막 한 토막 그 자체에 하나의 의미가 있어,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우리는 바쁘다. 때때로 매일 어딘가로 이동하는 행위 그 자체가 목적이 되기도 한다. 그 역전 현상에 목적지는 지위를 상실한다. 원하는 곳에 도달하지만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 빠른 이동 속도는 카지노 입플의 크기(거리)를 정복하도록 해주지만 카지노 입플을 지각하는 능력은 축소하고 무디게 만든다. 우리의 카지노 입플들은 대체로 그 이동 수단을 중심으로 설계돼 있다. 많은 공원이 그 입구에 넓은 주차장을 가장 먼저 배치하고, 대표적인 수변 카지노 입플은 말 그대로 도로 밑의 굴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눈만 움직이면 되기에 몸짓보다 시선은 더 빠를 수밖에 없다. 미술관에 가서도 한 그림에 시선을 머무르기보다는 어서 빨리 눈앞의 그림에서 다음 그림으로 또 다음 그림으로 이동한다. 그림을 보는 것은 핸드폰의 인공적 안구다. 또 그 디스플레이는 우리의 시선을 대신해서 빠르게 이동시켜 주기에 마치 우리가 이동 수단으로 카지노 입플을 정복한 것처럼 우리의 시선에 담을 수 있는 모든 세계를 정복하는 듯하지만, 어떠한 대상을 바라보는 지각력은 오히려 축소하고 무디게 만든다.

이 분주함이 바로 루이스 칸이 말한 무관한 움직임일까? 그래서 우리는 그 분주함 속에서 드라마가 일어나는 카지노 입플 공간을 가지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의 삶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카지노 입플는 어디에 있을까?

우리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카지노 입플는 어디인가?

광화문광장

2019년 서울시 공모를 통해 당선된 작품의 투시도를 보면 사람들이 앉아서 머무는 형태의 광장으로 구상한 듯하다. 실제로 방문해 보니 내부에서 외부를 바라보는 경관이 꽤 멋지다. 북악산을 병풍 삼아 앉아 있는 세종대왕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온다. 멀리서 햇빛을 받으며 반짝이던 사람들은 실내로 들어서면서 검은 움직임이 되고, 그대로 하나의 그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막상 설계 안에서 사람들이 앉아 있던 그 곳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다. 광장으로 나가보니 계단에 앉았을 때 보이는 건 기다란 미디어월뿐이다. 함께 바라볼 것이 또 다른 디스플레이뿐이라면 자연스럽게 모여들고 앉아서 머무는 카지노 입플 공간이 형성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광화문광장 / 사진. © 박정민
광화문광장 조성 투시도 © CA 조경기술사사무소 / 출처. 서울시 'PROJECT SEOUL' 홈페이지
다시세운광장과 을지로 하늘길

반면 이곳에는 함께 바라볼 수 있는 경관이 있다. 북악산자락을 배경으로 세계문화유산인 종묘가 보인다. 널찍한 건널목은 그곳을 건너는 움직임이 단순한 이동 이상의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느끼게 해준다. 다만 이곳에도 앉을 수 있는 카지노 입플 형태의 공간이 있지만 아무도 앉아 있지는 않았는데(물론 이날 날씨가 상당히 추워서일 수도 있다) 앉는 곳이 반대편(하단 ‘다시세운광장’ 사진의 왼쪽)에 있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자가 있는 곳에서는 종묘의 모습은 가려지고 건널목만이 보였다.
다시세운광장 / 사진. © 박정민
다시세운광장 건너편으로 보이는 종묘의 경관 / 사진. © 박정민
이 광장에서 이어지는 을지로 하늘길은 철거의 대상이 될 뻔했다고 한다. 유동량이 많지 않다는 이유다. 하지만 밀란 쿤데라의 문장을 마음속에 새기며 이 하늘길을 걸으니, 그곳에서 만나는 우리 도시의 표면은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었다. 시선의 높이에만 변화를 주어도 도시는 다른 모습을 드러내곤 한다. 계단을 자신의 무대로 삼는 사람들이 하나의 그림처럼 보이는 것은 그들이 그 공간에 부여된 기능을 거부하고 머무르고 또 바라보는 합의를 드러내는 데에 있다. 최신식 건물의 파사드와 오래된 건물의 파사드가 중첩되며 만들어내는 이미지에는 이 도시가 아직 드러나지 않은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고 느끼게 해주었다. 그런데 막상 카지노 입플 될 수 있는 공간을 찾아다녀 보니 문제는 공간 구조가 아니라는 생각도 들었다.
을지로 하늘길 / 사진. © 박정민
카지노 입플를 완성하는 것은 역동적인 연출을 위한 구조적 카지노 입플 장치일까? 카지노 입플 배경을 그리는 대가의 섬세한 터치일까? 하지만 그 어떤 높은 수준의 카지노 입플 요소도 응집된 에너지가 작은 구멍을 통과해 만드는 그 깔때기 모양의 터널 안에 가둬지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어떤 카지노 입플는 아주 단순하게 완성된다. 의자 하나 혹은 나무 하나, 자신이 연기하는 그 인물 그 자체가 되어버린 배우. 그 위로 빛의 터널이 씌워지는 순간, 카지노 입플는 더 이상 그 어느 것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도시 위에는 언제나 모든 것을 환하게 비추는 가장 강력한 조명 장치가 있다. 그 아래에서 모든 것을 담아내려는 시도는 언제나 실패로 돌아간다. 역설적이지만 무언가를 온전히 바라보려면 손에 든 것을 내려놓아야만 할 때가 있다. 무언가를 담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내 의식의 렌즈로 카지노 입플 위를 비추는 그 좁은 통로 같은 것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손에 든 것의 성능이 좋아질수록 그런 순간은 점점 희소해진다. 필름 카메라를 내려놓고 DSLR 카메라를 처음 들었을 때, 그마저도 무겁다며 영화도 찍을 수 있다는 핸드폰만 들고 다니기 시작했을 때 그러했다. 내 가장 깊숙한 곳까지 파고드는 그 특별한 순간을 포착하는 경험은 점점 더 소원한 일이 되어버린다.
을지로 하늘길 / 사진. © 박정민
서울이 주목받고 있다는 말이 자주 들린다. 그들은 우리의 역동성과 속도 같은 에너지를 부러워하는 것이리라. 그 에너지를 하나의 점에서 다른 점으로 이동하는 데에만 쓰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 눈앞에서 일어나고 있는 드라마를 바라보는 데에 쓴다면 그 에너지의 응집은 아주 강한 대비를 지닌 터널 하나를 만들어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빛의 터널 아래에 비친 도시는 혼돈의 베일을 벗겨내고 다양한 삶을 포용하는 카지노 입플 될 수 있을 것이다.

박정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