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계단은 어떻게 카지노 입플 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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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박정민의 열린 카지노 입플과 사유들영화가 거울로서 기능한다는 이론을 입증하기 위함인지 영화에는 관객이 앉아 있는 공간, 점진적으로 높아지는 그 구조를 거울처럼 반영한 공간이 빈번하게 등장한다. 이 장면들은 영화사(史)를 하나의 공간적 구조로 펼쳐놓는다면 꽤 높은 곳에 자리 잡을 것이다. 몰래 궁을 빠져나와 그 카지노 입플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공주, 링 위에서 승리를 꿈꾸며 그 카지노 입플에서 스트레이트 내뻗는 복서, 영화학도들의 교과서가 되어버린 그 카지노 입플 위로 덜컥거리며 미끄러진 유모차는 지난 100년간 사람들의 눈앞에서 몇 번이나 미끄러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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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카지노 입플이 특별하다고 처음 느꼈던 건 오스트리아의 빈에 방문했을 때였다. 이곳에 가게 된 건 순전히 거울로서 기능하며 <비포 선라이즈의 제시와 소피의 발자취를 반영하기 위함이었다. 돌이켜보면 부끄러워지는 순간도 있다. 영화가 개봉한 지 20년이 다 돼어서였을까? 혹은 그런 영화쯤은 아무것도 아닌 것으로 만들어버리는 수많은 이미지를 창조한 예술가들의 나라였기 때문일까? 영화에 등장한 장소들을 방문했을 때 사람들은 그 장소에 무관심했다. 하지만 그 덕분인지 이 도시가 내게 남긴 잔상은 길게 이어졌다.
영화에서 제시와 소피는 여러 곳을 스쳐 지나가는데 그중 하나가 벨베데레 궁전이다. 그들이 스쳐 지나간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바로크 양식의 이 궁전은 르네상스의 특징인 광장을 향해 열려있는 그런 카지노 입플을 갖고 있지 않다. 넓은 정원도 외벽에 둘러싸여 있고, 그 카지노 입플도 성안에 있다. 그림들이 전시된 방은 어느 쪽에서든 자연광이 스며들어오고, 벽에 칠해진 따스한 도료의 질감이 그 빛을 머금는다. 그래서 그림들을 바라볼 때 미술관이 아니라 귀족의 성에 방문해서 그의 소장품을 둘러보는 느낌을 준다.
그런데 계단 공간은 어두웠다. 계단참에는 검은 격자 프레임의 수직적 창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그 창은 남쪽을 면하고 있다. 해가 가장 높은 시간에 그 격자 프레임에 쪼개진 빛이 공기 중을 떠도는 먼지를 만나 질감을 드러내면 그 한가운데로 부티크에서 한땀 한땀 만든 드레스를 입은 부인이나 공주가 내려오는 카지노 입플였던 것일까?
아 이 사람들은 정말 이걸 오래 해왔구나. 이렇게 빛과 그림자의 대비로 무언가가 실제보다 더 빛나 보이도록 하는 일. 하지만 그 빛남은, 또 그 카지노 입플는 주로 왕족이나 귀족을 위한 것이었을 테다. 어쩌면 그들이 그 계단에 앉아서 먹고, 마시고, 즐기는 것은 전통적 권력을 형상화한 공간의 기능을 거부함으로써 그 권위에 대한 해방감을 느끼는 것일까?
속도와 카지노 입플 지각의 상관관계건축가 루이스 칸은 '도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거리이며 거리는 합의에 의한 커뮤니티 룸'이라고 했다고 한다. 또 '거리(streets)는 더 이상 없고, 오로지 도로(roads)만 존재한다'라고도 말했는데 그 이유가 집들과 무관한 움직임들만 거리에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저서를 거의 남기지 않은 건축가인데다 시적 표현이 많은 사람이어서인지 단번에 그 의도를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하지만 그와 거의 같은 방식으로 길과 도로를 적대적 위상에 떨어뜨려 놓은 밀란 쿤데라의 소설 <불멸의 한 문장은 루이스 칸이 말한 것을 문학적으로 지각하도록 도와준다.
'도로 그 자체는 아무 의미도 없다. 그저 두 지점을 연결해 준다는 의미뿐이다. 길은 카지노 입플에 대한 경의다. 길 한 토막 한 토막 그 자체에 하나의 의미가 있어, 우리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우리는 바쁘다. 때때로 매일 어딘가로 이동하는 행위 그 자체가 목적이 되기도 한다. 그 역전 현상에 목적지는 지위를 상실한다. 원하는 곳에 도달하지만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 빠른 이동 속도는 카지노 입플의 크기(거리)를 정복하도록 해주지만 카지노 입플을 지각하는 능력은 축소하고 무디게 만든다. 우리의 카지노 입플들은 대체로 그 이동 수단을 중심으로 설계돼 있다. 많은 공원이 그 입구에 넓은 주차장을 가장 먼저 배치하고, 대표적인 수변 카지노 입플은 말 그대로 도로 밑의 굴로 걸어 들어가야 한다.
눈만 움직이면 되기에 몸짓보다 시선은 더 빠를 수밖에 없다. 미술관에 가서도 한 그림에 시선을 머무르기보다는 어서 빨리 눈앞의 그림에서 다음 그림으로 또 다음 그림으로 이동한다. 그림을 보는 것은 핸드폰의 인공적 안구다. 또 그 디스플레이는 우리의 시선을 대신해서 빠르게 이동시켜 주기에 마치 우리가 이동 수단으로 카지노 입플을 정복한 것처럼 우리의 시선에 담을 수 있는 모든 세계를 정복하는 듯하지만, 어떠한 대상을 바라보는 지각력은 오히려 축소하고 무디게 만든다.
이 분주함이 바로 루이스 칸이 말한 무관한 움직임일까? 그래서 우리는 그 분주함 속에서 드라마가 일어나는 카지노 입플 공간을 가지지 못하는 것일까? 우리의 삶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카지노 입플는 어디에 있을까?
우리의 드라마가 펼쳐지는 카지노 입플는 어디인가?
광화문광장
2019년 서울시 공모를 통해 당선된 작품의 투시도를 보면 사람들이 앉아서 머무는 형태의 광장으로 구상한 듯하다. 실제로 방문해 보니 내부에서 외부를 바라보는 경관이 꽤 멋지다. 북악산을 병풍 삼아 앉아 있는 세종대왕 앞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걸어온다. 멀리서 햇빛을 받으며 반짝이던 사람들은 실내로 들어서면서 검은 움직임이 되고, 그대로 하나의 그림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막상 설계 안에서 사람들이 앉아 있던 그 곳에는 아무도 앉아 있지 않다. 광장으로 나가보니 계단에 앉았을 때 보이는 건 기다란 미디어월뿐이다. 함께 바라볼 것이 또 다른 디스플레이뿐이라면 자연스럽게 모여들고 앉아서 머무는 카지노 입플 공간이 형성되기는 어려울 것 같았다.
반면 이곳에는 함께 바라볼 수 있는 경관이 있다. 북악산자락을 배경으로 세계문화유산인 종묘가 보인다. 널찍한 건널목은 그곳을 건너는 움직임이 단순한 이동 이상의 것을 의미하는 것처럼 느끼게 해준다. 다만 이곳에도 앉을 수 있는 카지노 입플 형태의 공간이 있지만 아무도 앉아 있지는 않았는데(물론 이날 날씨가 상당히 추워서일 수도 있다) 앉는 곳이 반대편(하단 ‘다시세운광장’ 사진의 왼쪽)에 있었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의자가 있는 곳에서는 종묘의 모습은 가려지고 건널목만이 보였다.
도시 위에는 언제나 모든 것을 환하게 비추는 가장 강력한 조명 장치가 있다. 그 아래에서 모든 것을 담아내려는 시도는 언제나 실패로 돌아간다. 역설적이지만 무언가를 온전히 바라보려면 손에 든 것을 내려놓아야만 할 때가 있다. 무언가를 담기 위해서 해야 할 일은 내 의식의 렌즈로 카지노 입플 위를 비추는 그 좁은 통로 같은 것을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손에 든 것의 성능이 좋아질수록 그런 순간은 점점 희소해진다. 필름 카메라를 내려놓고 DSLR 카메라를 처음 들었을 때, 그마저도 무겁다며 영화도 찍을 수 있다는 핸드폰만 들고 다니기 시작했을 때 그러했다. 내 가장 깊숙한 곳까지 파고드는 그 특별한 순간을 포착하는 경험은 점점 더 소원한 일이 되어버린다.
박정민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