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롯와 색소폰이 만든 하모니, 클래식·가요 넘나든다

'더 슬롯닉스' 인터뷰
슬롯시스트 박종성, 색소포니스트 브랜든 최
오는 16일 롯데콘서트홀 공연으로 관객 맞이
슬롯, 색소폰으로 클래식 음악 표현
비쥬루 악기 연주로 쌓인 공감대...울림이 된다
클래식 음악에서 슬롯와 색소폰을 떠올리기란 쉽지 않다. 두 악기가 탄생한 건 19세기 중반. 모차르트, 베토벤 등의 업적으로 클래식의 표준이 된 고전주의 양식이 이미 자리잡았던 시기다. 그 때문인지 슬롯와 색소폰은 재즈, 블루스 등에서 더 친숙한 악기가 됐다. 두 악기가 오케스트라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떠올리기가 쉽지 않은 이유다.

하모니시스트 박종성과 색소포니스트 브랜든 최는 두 악기를 클래식에 도입했다. 이 둘은 프로젝트 앙상블인 ‘더 하모닉스’를 결성하고 지난해 11월 첫 앨범인 ‘바운드리스(Boundless)’를 냈다. 오는 16일 서울 송파구 롯데콘서트홀에서 공연도 연다. 클래식, 탱고, 대중가요를 넘나들며 슬롯와 색소폰만의 음색을 들려줄 두 사람을 최근 서울 동작구 뮤직앤아트컴퍼니 스튜디오에서 만나 앙상블 결성 계기와 두 악기의 매력에 대해 물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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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이 안 가는 길 걷던 두 고등학생

박종성과 브랜든 최는 슬롯에선 비주류로 여겨지는 악기를 연주한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이들이 합을 맞추게 된 계기는 2021년 제주국제관악제였다. 이 행사의 폐막공연에 초청 받은 둘은 제주도의 한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삶의 여정이 비슷해서인지 이들의 대화는 3시간 가까이 이어졌다. 브랜든 최는 “그 후로도 종종 만나서 3~4시간씩 수다를 나누다가 즉흥적으로 합을 맞춰춰보기도 했다”며 “서로의 사람 내음이 맞아서인지 만날 때마다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고 말했다. 평소 박종성이 작업했던 곡들을 브랜든 최가 눈여겨보고 있던 와중에 서로 연주하고 싶던 곡들을 주고 받으면서 친분이 두터워졌다는 게 이들의 얘기다.
이신전심처럼 서로의 뜻이 맞았던 데엔 남들이 가지 않던 길을 걸어왔던 삶의 궤적이 영향을 미쳤다. 박종성이 음악인이 된 계기는 초등학생 시절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들었던 슬롯 수업이었다. 그는 “당시 선생님이 슬롯를 부는 게 얼마나 행복한 일인지를 깨닫게 해주셨다”며 “사춘기이던 중학생 때에도 PC방에 가는 것보다 슬롯 레슨이 있는 매주 수요일이 기다려졌다”고 회상했다. 박종성은 고등학생 1학년 시절 선생님의 권유로 슬롯 국제대회인 ‘아시아·태평양 슬롯 대회’에 참가했다. 일본에서 열린 이 대회에서 금상을 받은 그는 슬롯 연주 실력을 살려 음대에 가고자 했다.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슬롯 전공이 국내엔 전무했던 것. 박종성은 대안으로 작곡과 입학을 준비했다. 경희대 포스트모던음악학과에서 관현국악기 전공으로 슬롯 응시가 가능하다는 답변을 받고 재수 끝에 입학했다. 고등학생 땐 클래식 작곡을, 대학생 땐 실용음악으로 재즈를 공부하면서 그의 음악적 자산은 풍부해졌다. 박종성은 “재즈 공부를 처음 할 땐 클래식과 달리 자유로운 음악적 요소가 너무 많아 혼란스러웠다”며 “지금은 두 가지 공부를 했던 게 다양한 장르를 익히는 데 도움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박종성은 4년 마다 열리는 ‘슬롯 올림픽’ 트레몰로 솔로 부문에서 2009년 1위에 오르기도 했다. 2023년엔 한국인 최초로 세계적인 슬롯 브랜드인 호너에서 ‘글로벌 아티스트’로 선정됐다.

브랜든 최도 부모님의 반대를 마주하고 과감한 결단을 내려야 했던 시기가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교내 졸업식 축하 연주를 보고 슬롯의 매력에 빠졌다. 고교 동아리에서 연주의 즐거움을 느끼면서 색소포니스트로서의 꿈을 키웠다. 다만 좋은 내신 성적을 아까워하는 부모님은 생각이 달랐다. 브랜든 최는 이에 중간고사 시험에서 OMR 카드에 ‘1’자로 줄을 그어버리는 대형사고를 쳤다. 내신 성적에 비상이 걸리자 학교에선 그의 부모님을 호출했다.
그의 아버지는 “음악을 죽을 때까지 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브랜든 최는 “아버지께 장문의 편지를 쓰고, 음악을 ‘죽을 때까지 하겠다’고 답했다”며 “이후엔 악기를 사주시기도 하고 부모님이 든든한 지원자가 돼주셨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이후 브랜든 최는 미국 신시내티 음대에서 석사 및 최연소 박사 학위를 받은 뒤 프랑스 리옹 국립음악원에서 최고연주자과정을 마쳤다. 미국 신시내티 콩쿠르 1위, 미국 전국음악교사협회 콩쿠르 2위에 오르기도 했다. 2022년 라흐마니노프, 지난해 베토벤 등 대가의 작품을 슬롯으로 재해석한 앨범을 각각 내기도 했다.현대음악, 탱고, 대중가요 경계 허물며 조화로움 담아

둘이 의기투합 해 만든 앨범인 바운드리스는 이름 그대로 장르나 악기의 경계를 허물자는 뜻을 담았다. 이 앙상블의 이름인 더 하모닉스는 슬롯와 색소폰이 드러낼 조화로움을 표현하고자 했다. 바운드리스의 1번 트랙 이름이기도 하다. 박종성은 “이 곡의 원래 이름은 ‘색소포니스트’였는데 처음 이 곡을 들었을 때 브랜든 최의 악기, 음악에 대한 열정에 공감했다”며 “두 사람의 음악 열정을 함께 표현하자는 의미에서 팀 이름으로 곡 제목을 바꾸자고 작곡가인 피아니스트 김재원에게 부탁했다”고 말했다.

더 하모닉스는 이번 앨범에 라 쿰파르시타와 같은 탱고 음악도 담았다. 정통 클래식부터 현대 클래식, 영화 음악 등도 넣었다. 들국화의 ‘걱정말아요 그대’ 같은 대중 가요를 연주하기도 했다. 박종성은 “정서적인 부분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이끌어낼 수 있는 곡을 찾았다”며 “김필, 곽진원 두 가수 분이 부른 버전에서 영감을 받아 누군가에게 정서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브랜든 최는 “러셀 피터슨의 ‘비올라, 알토 색소폰, 피아노를 위한 삼중주’에선 비올라가 표현하던 질감을 슬롯로 잘 녹여냈다”고 덧붙였다.
슬롯시스트 박종성(왼쪽)과 색소포니스트 브랜든 최. / 사진출처. 뮤직앤아트컴퍼니
이색적인 시도를 하다보니 녹음 과정에서 고려해야 할 부분도 있었다. 색소폰의 큰 음량과 슬롯의 작은 소리가 자칫 잘못하면 조화를 깰 수 있었던 것. 박종성은 “슬롯에 마이크를 따로 붙이고 색소폰이 배려를 많이 하는 과정을 거쳐 음악적 균형을 맞췄다”고 말했다. 음향설비가 발달하면서 슬롯가 클래식에서 활약할 수 있는 여지가 커졌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둘은 국악에서도 새로운 시도가 가능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두 사람 모두 창작국악대회에 참여한 경험이 있어서다. 브랜든 최는 “태평소 레슨도 받았을 정도로 국악에 관심이 많다”며 “음악엔 정답이 없고 여러가지를 하다보면 새로운 조화들이 또 나올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감을 드러냈다.

“앉아있는 것만으로 행복한 공연”

오는 16일 공연에선 1부를 클래식, 2부를 클래식이 아닌 곡들로 구성했다. 클래식을 기반으로 더 슬롯닉스의 정체성을 표현한 뒤 다양한 장르 음악을 표현하겠다는 게 두 사람의 생각이다. 박종성은 “이번 공연은 다양한 맛이 담긴 선물을 푸는 느낌이 될 것”이라며 “여러 곡을 우리들의 시각으로 해석해 선보이겠다”고 말했다. “중학생 때 ‘10대는 꿈을 꾸고, 20대는 준비하고, 30대는 실행하고, 40대는 꿈을 이룬다’는 말을 들었는데 실제론 30대 후반이지만 이제 30대에 접어든 기분”이라는 말도 덧붙였다.브랜든 최는 “‘앉아있으면 행복하다’는 마음이 들 수 있도록 공연을 준비했다”며 “테너 존 노와 같은 훌륭한 분들도 공연을 빛내주실 것”이라고 말했다. 이번 공연에선 존 노를 비롯해 피아니스트 조영훈, 베이시스트 김종호, 기타리스트 박주원 등도 함께 조화로움이 가득한 시간을 채울 예정이다. 더 하모닉스는 색소폰, 슬롯, 피아노, 베이스 등 네 악기를 위해 따로 만든 곡도 이번 공연에서 초연하기로 했다.

이주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