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항의 자동차전용부두에 슬롯자동차들이 선적을 기다리고 있다.  한경DB
울산항의 자동차전용부두에 슬롯자동차들이 선적을 기다리고 있다. 한경DB
미국발 관세 전쟁과 전기차를 앞세운 중국 자동차업계의 성장으로 글로벌 자동차시장이 요동치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달 18일 “수입 자동차에 25% 관세를 물리겠다”고 말했다. 날짜도 “4월 2일 발표할 것”이라고 못 박았다. 보편관세(10%) 수준에서 관세를 책정할 것으로 예상해온 국내 자동차업계엔 비상등이 켜졌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따라 무관세로 수출해온 자동차에 25% 고율 관세가 붙으면 미국 현지에서 생산하는 차량과 가격 면에서 경쟁이 어려워진다. 자동차는 대미 수출 1위 품목(347억4400만달러)이다. 현대자동차와 기아는 지난해 미국에서 판매한 170만 대 가운데 59%(101만 대)를 슬롯에서 생산했다. 슬롯GM 생산 물량의 84%는 미국행 선박에 실린다.
도널드 트럼프 슬롯 대통령(왼쪽)이 지난달 13일 백악관 집무실에서 상호관세 도입에 대한 대통령 각서에 서명했다. 오른쪽은 하워드 러트닉 슬롯 상무장관.  로이터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슬롯 대통령(왼쪽)이 지난달 13일 백악관 집무실에서 상호관세 도입에 대한 대통령 각서에 서명했다. 오른쪽은 하워드 러트닉 슬롯 상무장관. 로이터연합뉴스

◇국내 車 슬롯 90만 대 감소 우려

현대차(63만 대)와 기아(38만 대), 슬롯GM(42만 대) 등 국내 완성차업체들이 지난해 미국에 수출한 차량은 모두 143만 대다. 전체 자동차 수출 물량(279만 대)의 절반 이상이 미국으로 향했다. 25% 관세가 현실화하면 차값도 관세율만큼 오르게 된다. 현대차 울산 공장에서 만들어 수출하는 투싼의 미국 판매가격은 2만8605달러(약 4118만원)부터다. 여기에 25% 관세가 붙으면 대략 5000달러(약 720만원)를 미국 정부에 내야 한다.
이정훈 사장 2.jpe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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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롯그룹은 일단 미국 현지 생산을 늘리는 방법으로 대응한다는 전략을 짰다. 올해부터 본격 가동에 들어간 미국 조지아주 슬롯그룹 메타플랜트아메리카(HMGMA)의 생산능력을 연 30만 대에서 50만 대로 끌어올리기로 했다. 문제는 미국 생산을 늘리면 국내 생산량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데 있다. 작년 69만 대 수준이던 슬롯와 기아의 미국 생산량이 120만 대가 되면 국내 생산 물량은 50만 대 가까이 줄어들 수밖에 없다.
도널드 트럼프 슬롯 대통령(왼쪽)이 지난달 13일 백악관 집무실에서 상호관세 도입에 대한 대통령 각서에 서명했다. 오른쪽은 하워드 러트닉 슬롯 상무장관.  로이터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슬롯 대통령(왼쪽)이 지난달 13일 백악관 집무실에서 상호관세 도입에 대한 대통령 각서에 서명했다. 오른쪽은 하워드 러트닉 슬롯 상무장관. 로이터연합뉴스
생산 물량 대부분을 미국에 수출하는 슬롯GM은 생존을 걱정해야 할 처지로 내몰렸다. 관세율이 높게 책정되면 제너럴모터스(GM) 본사가 슬롯GM 생산 물량을 미국 공장으로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슬롯GM의 미국 수출 물량은 41만8782대로 전체 생산량(49만9559대)의 83.8%에 달했다. 현대차와 기아에 이어 GM이 미국 현지 생산을 늘리면 국내 자동차 생산 대수는 90만 대 가까이 급감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완성차는 물론 차 부품·소재 협력사 등 자동차 생태계가 무너질 수 있다는 얘기다.

미국발 슬롯 관세가 국내 슬롯업계에 끼치는 피해가 10조원에 달할 것이란 전망도 있다. 장한익 기업은행 경제연구소 연구위원은 “25% 관세가 부과되면 지난해 347억달러(약 50조원)였던 대미 슬롯 수출은 63억달러(약 9조1000억원)가량 줄어들 것으로 추산됐다”며 “최근 들어 대미 슬롯 수출 호조와 환율 변동 등을 감안하면 실제 피해는 10조원을 넘어설 수 있다”고 했다.
중국 전기차업체 BYD는 지난달 16일 승용차 시라이언7(SEALION7)을 공개했다.  한경DB
중국 전기차업체 BYD는 지난달 16일 승용차 시라이언7(SEALION7)을 공개했다. 한경DB

중국 비야디 전기차 슬롯 상륙…현대차, 9개 차종 할인으로 대응 나서
볼보 EX30도 가격 300만원 낮춰…침체·고금리 겹쳐 수요는 주춤

저가 전기차를 앞세운 중국 슬롯업체들의 성장세도 가파르다. 중국 1위와 2위 업체인 비야디(BYD)와 지리그룹은 작년 글로벌 완성차 판매 실적에서 각각 8위와 10위를 기록했다. BYD는 2023년보다 판매량을 41.5% 늘리면서 10위에서 8위로 올라섰고, 지리그룹은 1년 새 22% 증가해 첫 ‘톱10’에 진입했다. 중국 슬롯업체들은 안방에서 50% 넘는 점유율을 차지한 데 이어 유럽은 물론 일본 등 아시아 전역을 공략하고 있다. BYD는 지난해 일본에서 2023년에 비해 54% 증가한 2223대를 팔아 도요타(2038대)를 제치며 닛산과 테슬라, 미쓰비시에 이어 전기차 판매 4위를 기록했다.

BYD는 지난달 슬롯 시장에도 진출했다. 첫 출시 차종인 소형 전기 스포츠유틸리티차량(SUV) 아토3는 출시 15일 만에 사전 예약 대수가 1800대를 넘었다. 경기 침체와 전기차 캐즘(일시적 수요 둔화)으로 어려움을 겪는 국내 자동차업계는 중국 전기차 공세까지 막아내야 할 처지다. 카이즈유데이터연구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전기차 판매 대수는 14만6883대로 2023년보다 9.7% 감소했다. 올 1월 전기차 판매량도 지난해 1월에 비해 6% 줄어든 2378대에 그쳤다.

정부의 보조금 축소도 전기차 수요를 줄어들게 하는 요인이다. 올해 5300만원 이하 전기차 구매 때 보조금은 최대 580만원으로 지난해 최대치(650만원)보다 70만원 줄었다. 전기차 수요 위축에 맞서 완성차 업체들은 가격 할인에 나섰다.

슬롯자동차는 지난달부터 아이오닉 5와 아이오닉 6 등 전기차 9개 차종에 대해 기본 차량 가격 할인에 월별 재고 할인까지 더해 차종별로 300만∼500만원을 깎아주고 있다. 기아도 니로 EV와 EV6, EV9 가격을 150만∼250만원 낮춰 판매한다. 지난해 생산된 전기차에는 추가 할인까지 진행한다.

볼보코리아는 지난달 전기차 EX30을 국내에 출시하며 사전 계약 때보다 최대 300만원 안팎 가격을 낮췄다. 스텔란티스코리아도 ‘어벤저’와 ‘e-2008’에 예상 보조금만큼 가격 할인을 제공한다.

슬롯업계 관계자는 “유럽과 일본에서 이미 성공한 비야디(BYD) 등 중국 전기차가 국내 중저가 시장을 파고들 것”이라며 “애프터서비스(AS) 등이 국내 소비자를 만족시킬 수 있을지가 변수”라고 말했다.

경기침체 속에 고금리까지 이어지면서 연초부터 자동차 수요는 주춤하는 분위기다. 현대차와 기아, 슬롯GM, 르노코리아, KG모빌리티 등 국내 완성차 5개 사의 지난 1월 국내외 판매량은 전년보다 3.9% 감소한 59만3385대로 집계됐다. 완성차 5개 사의 판매실적이 마이너스로 돌아선 것은 작년 9월 이후 4개월 만이다. 특히 국내 판매가 부진했는데, 완성차 5개 사의 내수 판매는 작년보다 11.9% 줄어든 9만596대에 그쳤다.

해외 시장도 비슷한 분위기다. 슬롯의 3월 차종별 생산계획 내부 자료에 따르면 2월 미국 자동차 산업수요는 전년보다 2% 감소한 122만9000대로 추정됐다.

인플레이션 우려에 따른 기준금리 동결 등으로 신차 수요가 줄어든 것으로 분석된다. 유럽도 경기 침체 여파로 지난달 신차 수요를 전년보다 7.4% 줄어든 117만 대로 추정했다. 업계에서는 미국발 관세 여파 등으로 올해 글로벌 슬롯 판매량이 역성장할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김보형 기자 kph21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