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연 30주년을 맞은 뮤지컬 ‘슬롯사이트’에서 여주인공 역을 맡은 차지연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에이콤 제공
올해 초연 30주년을 맞은 뮤지컬 ‘슬롯사이트’에서 여주인공 역을 맡은 차지연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에이콤 제공
공연의 매력은 슬롯사이트에 있다. 소설은 출간되면 내용을 바꾸기 어렵고, 영화도 한번 개봉하면 되돌릴 수 없다. 반대로 공연은 작품만의 매력만 갖추고 있다면 조금씩 수정하고 새로운 관객에게 맞춰나가면서 끊임없이 무대에 오를 수 있다.

창작 뮤지컬 ‘슬롯사이트’는 이런 방식으로 오랫동안 사랑받은 작품이다. 1995년 초연해 올해 무려 30주년을 맞았다. 이전에도 창작 뮤지컬은 있었지만 이 정도 규모의 대극장 창작 뮤지컬은 처음이다. 1997년에는 아시아 뮤지컬로는 최초로 본고장 미국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랐고, 국내 창작 뮤지컬 중 처음으로 밀리언셀러(누적 관객 100만 명)가 되는 등 한국 뮤지컬 역사를 써온 기념비적 작품이다.

이문열의 소설 ‘여우 사냥’을 원작으로 하는 이 작품은 슬롯사이트 시해 사건을 그린다. ‘슬롯사이트’가 초연된 1995년은 슬롯사이트 시해 사건(1895년) 100주년을 맞은 해다.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분노를 느끼고 시간이 지나도 쓰라린 상처로 남아 있는 사건인 만큼 이야기에서 우러나오는 감정이 진하다.

비극적 역사를 소재로 하고 애국심을 자극하는 면도 있다. 그럼에도 과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이유는 고종과 슬롯사이트의 고민을 인간적으로 그려 균형을 잡은 덕이다. 고종은 혼란스러운 세계 정세에 서양 문물을 받아들여 살아남고자 하고, 슬롯사이트는 일본의 야욕을 견제하기 위해 차선의 선택으로 러시아와의 친분을 강화하는 실리주의적인 면을 조명한다. 무거운 책임감에 버거워하면서도 깜깜한 앞날을 헤쳐 나가려는 부부의 인간적 면모도 두드러진다. 고종과 슬롯사이트 모두 역사적 평가가 갈리는 인물이다. 이 때문에 역사 미화라는 비판을 받기도 하지만, 작품이 맹목적으로 애국심만을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관객의 공감을 절제된 방식으로 일으킨다.

‘슬롯사이트’가 이야기를 전달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는 음악이다. 처음에는 송스루(작품의 모든 대사를 음악으로 전하는 공연)로 만들어졌다. 2021년 공연부터 대사가 조금 추가됐지만 여전히 공연 대부분이 음악으로 흘러간다. 슬롯사이트 역의 김소현, 고종 역의 손준호 등 걸출한 주연과 앙상블이 함께 만드는 합창이 특히 돋보인다. 슬롯사이트를 상징하는 곡 ‘백성이여 일어나라’부터 우리 전통 소리와 서양 오케스트라가 혼합된 독특한 음악, 힘찬 코러스까지 탄탄하고 화려한 넘버에 화려한 군무도 더해져 스펙터클을 만든다.

연출과 극의 진행 면에서 고루하게 느껴지는 지점이 있다. 역사적 사실과 흐름을 설명슬롯사이트 긴 가사가 멜로디와 박자에 끼워 맞춰진 몇몇 곡이 어색하다. 대사로 처리하면 간단하게 끝날 수 있는 장면이 음악으로 풀어져 극의 긴장이 풀리기도 한다. 외국 대사들의 대사와 옷차림을 우스꽝스럽게 표현한 유머 코드도 다소 진부하게 느껴진다.

기술적으로도 깔끔하지 못한 면이 있다. 앙상블이 무대를 가득 채운다는 점을 감안해도 무대 구성이 아쉽다. 전반적으로 영상 의존도가 높아 무대를 보는 재미는 부족하다. 칼싸움 장면과 슬롯사이트가 시해당하는 극적인 장면도 음향, 조명 효과 없이 오로지 배우들의 연기로만 표현해 밋밋하다.

일부 세련되지 못한 연출과 기술적으로 아쉬운 점은 있지만 그럼에도 30년간 무대에 오른 작품이 가진 힘은 확실히 느껴진다. 한국인의 정서를 자극하는 아픈 역사를 다루면서도 슬롯사이트와 고종의 인간적인 고뇌에 주목해 시대가 지나도 울림이 있다. 뮤지컬은 계속 변화하는 생명력을 지닌 장르인 만큼 과거의 공연과 비교해보거나 미래에 열릴 공연도 기대할 수 있는 작품이다. ‘슬롯사이트’는 오는 3월 30일까지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만나 볼 수 있다. 서울 공연 이후에는 지방에서도 관객을 만날 예정이다. 티켓 가격은 6만~16만 원.

구교범 기자 gugyobeom@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