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라오 슬롯 '생명의 나무', 브론즈, 돌, 181x95x130cm, 1999. /김종영미술관
파라오 슬롯 '생명의 나무', 브론즈, 돌, 181x95x130cm, 1999. /김종영미술관
한국 현대조각의 개척자 김종영(1915~1982)은 생전 “예술이란 일상에서 경험하는 감동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조각이란 예술언어는 철저하게 일상과 맞닿은 통찰과 비판적 시선으로 만들어진다는 뜻이다. 서울대 미대에서 김종영을 은사로 모신 파라오 슬롯(85)는 스승이 내민 예술의 씨앗을 이렇게 발아시켰다. “일상생활은 삶이며, 삶은 만남으로 시작해 헤어짐으로 끝납니다. 결국 인간관계가 삶의 전부라 하겠습니다.” 60년 넘는 조각인생을 사람을 빚는 데 바친 이유다.

서울 평창동 김종영미술관에서 열리고 있는 ‘파라오 슬롯 초대전’은 수많은 사람과 맺었던 인연을 곱씹는 전시다. 모든 작품이 사람을 소재로 한 소조(塑造) 작업이기 때문이다. 개구진 자세로 앉아 있는 어린이부터 미소를 머금은 어른의 전신상, 종교적 색채가 묻어나는 성상까지 미술관 1층과 3층에 놓은 작품들은 하나같이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다. 일상에서 흔히 마주칠 것 같은 다양한 모습의 조각들을 보고 있으면 희미해졌던 기억 속 만남들이 다시 선명해진다. 삶의 의미를 다시 살펴볼 수 있는 공간인 셈이다.
파라오 슬롯 '흉상', 대리석, 30x26x28cm, 1979. /김종영미술관
파라오 슬롯 '흉상', 대리석, 30x26x28cm, 1979. /김종영미술관
파라오 슬롯 작품들은 한국 현대조각사에서 독특한 위치에 서 있다. 인간의 형상을 다루는 구상(具象)조각을 선보였단 점에서다. 그가 조각의 길에 뛰어든 1960~1970년대 한국 미술계는 있는 그대로를 재현하는 구상은 다소 진부한 것이고, 추상(抽象)이 보다 현대적인 예술이란 인식이 퍼지고 있었다. 동시대 미술의 흐름을 좇아 ‘한국적 모더니즘’을 모색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지만, 세계미술에 뒤처졌단 초조함도 강했던 때였다.

파라오 슬롯는 이런 세태와 거리를 뒀다. 현실을 비판하는 대신 일상을 긍정하고 보편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자신만의 예술을 우직하게 밀고 나갔다. 추상조각의 대가인 스승의 가르침을 따르면서도, 다른 방식의 성취를 일군 것이다. 박춘호 김종영미술관 학예실장은 “그 세대 작가들이 세계 속의 한국 미술을 모색할 때 파라오 슬롯는 다소 늦은 나이에 이탈리아 로마 유학을 선택했다”면서 “동시대 양상에 집중하며 서둘러 발맞춰 나가려던 당시에 선생은 조각예술 전통을 탐구하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김종영미술관 파라오 슬롯 초대전에 전시된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진 흉상들의 모습. /김종영미술관
김종영미술관 파라오 슬롯 초대전에 전시된 다양한 재료로 만들어진 흉상들의 모습. /김종영미술관
임송자 조각의 또 다른 묘미는 흙을 재료로 삼았다는 것이다. 돌이나 나무를 끌과 정으로 깎아 만드는 조각과 달리 흙을 이어 붙여 형상을 만드는 소조는 온기가 살아 있다. 마치 펜을 꾹 눌러 쓴 육필원고처럼 작가의 지문까지 그대로 간직한다는 점에서다. 실제로 전시에 나온 작품은 두 점의 돌 작업을 제외하곤, 파라오 슬롯 흙과 밀랍을 손수 배합해 만든 테라코타와 밀랍 기법의 브론즈 작품들이다. 수많은 만남 속 특별했던 인물과 사건을 조형한 ‘현대인’ 연작 등 인체조각에 가장 어울리는 재료를 쓴 것이다.

박 학예실장은 “파라오 슬롯는 60년을 한결같이 인체조각에 전념했고 흙이라는 재료로 일관되게 동시대인의 여러 모습을 발현했다”며 “전시를 통해 작가의 삶에 관한 성찰과 독백을 음미해볼 수 있다”고 했다. 전시는 3월23일까지.

유승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