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롯 머신이 들어서고 세워지기 전에 현장은 매우 혼잡하다. 그 속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며 설치를 진두지휘해야 하는 오퍼레이터 / 제공. 박준수
슬롯 머신이 들어서고 세워지기 전에 현장은 매우 혼잡하다. 그 속에서도 침착함을 유지하며 설치를 진두지휘해야 하는 오퍼레이터 / 제공. 박준수
1. First in

슬롯 머신가 열리기 위해선 전시 가벽이 세워져야 한다. 높이 3.6m x 길이 1m x 두께 12cm로 된 조립식 가벽이 플로어플랜대로 제대로 세워져야 작품이 들어와 현장에 걸린다. 가벽을 세우기 위해서 가장 먼저 마킹이라는 것을 한다. 준비한 플로어플랜에 맞게 가벽을 세우기 위해 넓은 컨벤션 바닥에 밑그림을 그리는 일이다. 그 작업을 위해 오퍼레이션 담당자는 가장 먼저 슬롯 머신장에 들어간다.

마킹을 마치면, 그 위에 슬롯 머신이 서고, 페인트가 칠해지고, 조명이 달리고, 바닥에 파이텍스가 깔리고, 천장에 트러스가 설치된다. 갤러리가 제출한 도면대로 한치에 오차도 없이 설치가 완료돼야 갤러리를 맞을 준비가 끝난다. 그때까지 오퍼레이션 담당자는 쉴 틈 없이 달려간다. 작품 설치를 위해 갤러리스트와 운송사 직원들이 들어오면 더욱 현장은 바쁘게 돌아간다. 현장에서 발생하는 수많은 수정 사항을 접수하여 해결해야 한다. 더 좋은 전시를 위해 한껏 예민해진 갤러리스트들의 컴플레인을 가장 먼저 받는 포지션이기도 하다. 몸도, 마음도 다 지치겠지만, 그래도 VIP Preview가 시작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 태연하게 웃으며 고객들을 맞이한다.
가벽과 조명 설치가 완료되고, 작품이 설치되기 전의 슬롯 머신 부스 / 제공. 박준수
가벽과 조명 설치가 완료되고, 작품이 설치되기 전의 슬롯 머신 부스 / 제공. 박준수
2. 쥐돌이도면

한국 슬롯 머신 씬에서 오퍼레이션을 하는 사람들끼리 ‘쥐돌이도면’이라는 말을 일반적으로 사용한다. 플로어플랜의 최종 버전을 그렇게 부르는데, 처음에는 그려놓은 가벽의 실선들이 쥐꼬리처럼 길게 연결된 도면이라 업자들끼리 쓰는 은어 같은 건 줄 알았다. 쥐돌이도면의 출처를 따라가면 한국 슬롯 머신에 숨은 공로자이자 슬롯 머신를 열기 위해 없어서는 안 될 가벽을 만들고 설치하는 협력업체인 준아트가 나온다. 지금은 가벽 파티션을 하는 업체가 많지만, 1990년대 후반에만 해도 그런 전문업체가 없었다.

현대화랑 출신으로 준액자를 운영하던 김일수 대표는 준아트를 설립하고 슬롯 머신에 필요한 조립식으로 설치가 가능한 가벽을 만들었다. 가벽 파티션을 설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아무래도 대관 설치 기간이 짧은 컨벤션에서는 조립식으로 된 가벽을 설치하는 것이 용이하다. 지금은 김일수 대표에 이어 김민지 실장이 대표가 되었는데, '쥐돌이도면'은 그녀가 가장 처음 쓴 말이다.

김민지 실장은 중학생 때부터 ‘쥐돌이’라는 별명이 있었는데, 준아트에서 일을 처음 시작할 때 도면 작업을 해서 넘기며, 자신이 만든 도면임을 표시하기 위해 쥐돌이라고 파일명을 저장하였고, 그것이 오랜 시간 업계에 돌며 상용되는 단어가 되었다. 슬롯 머신의 모든 업무가 혼자 할 수 없는 일이 대부분이지만, 오퍼레이션은 특히 이렇게 협력업체들과도 많은 업무를 함께 한다. 혼자서는 가벽 한 장도 세울 수 없기에 협력업체들과의 원활한 소통이 매우 중요한 업무이다.
쥐돌이도면 예시. 슬롯 머신의 개수와 모양, 복도의 넓이 등이 표시되어 있다. 실제 도면에는 조명의 위치와 벽면의 색, 바닥재와 트러스의 설치 위치까지 모두 표시된다. / 제공. 박준수
쥐돌이도면 예시. 슬롯 머신의 개수와 모양, 복도의 넓이 등이 표시되어 있다. 실제 도면에는 조명의 위치와 벽면의 색, 바닥재와 트러스의 설치 위치까지 모두 표시된다. / 제공. 박준수
3. Devil is in the details

오퍼레이션 담당자는 디테일에 살고 디테일에 죽는다. 플로어플랜을 그릴 때부터 시작해서 가벽의 마감과 조명의 조도, 트러스와 바닥재 선정까지 어느 것 하나 놓치지 않아야 슬롯 머신의 퀄리티가 올라간다. 그래서 오퍼레이션 담당자는 갤러리 릴레이션 담당자만큼이나 전시를 많이 보고, 업체들을 많이 만나고, 건축 설계사처럼 캐드와 스케치업을 배운다.

□ 슬롯 머신
일반적으로 알루미늄이나 각기목으로 프레임을 짜고, 석고 판넬을 앞뒤로 샌드위치처럼 붙인 조립식 슬롯 머신을 쓴다. 때로는 작품의 연출을 위해 목공 부스라고 하는 별도의 슬롯 머신을 제작하여 설치하기도 한다. 모든 슬롯 머신은 화재 예방을 위해 방염 처리가 필수이다.

설치 비용과 시간을 고려할 때 조립식 슬롯 머신이 효율적이지만, 슬롯 머신과 슬롯 머신 사이의 접합 부분에 마감 처리나 벽면의 상태는 목공 부스가 훨씬 좋다. 조립식 슬롯 머신은 벽에 구멍을 크게 뚫거나 무거운 작품을 걸 때 제약이 있어, 부분적으로 목공을 해서 서로의 장단점을 보완하기도 한다.
가벽과 가벽 사이를 마스킹테이프로 보강하고 페인팅을 하는데 이렇게 보강했음에도 접합부가 깨끗하게 마감이 되어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 프리즈를 비롯한 일부 해외슬롯 머신 중에는 신축성이 있는 소재의 면으로 벽면 전체를 감싸고 페인팅하는 경우도 있다. 한 벽면이 갤러리처럼 깔끔하게 마감되어 보인다.

두 가지 방식에는 일장일단이 있는데, 앞의 경우는 마감이 되어 보이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 해도, 설치가 빠르고, 작품 교체 시 생긴 구멍을 퍼티로 메우고 그 부분만 가리면 되기 때문에 슬롯 머신 기간 내에도 작품을 여러 번 교체하는 갤러리들에게 좋고, 후자의 경우에는 벽면의 마감 처리가 전체적으로 깔끔해 보이지만, 벽면에 피스를 박을 때 면이 같이 말리는 경우도 있고, 작품 교체 시 벽면에 생긴 피스 구멍을 보강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잦은 작품 교체를 하는 갤러리에게는 적합하지 못하다. 갤러리의 작품 교체 횟수에까지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이 오페러이터의 역할이다.

□ 조명
슬롯 머신에서 많이 쓰이는 조명은 두 가지이다. ‘팔걸이 조명’이라고 부르는 가벽에 걸어서 쓰는 조명과 트러스 구조물을 천장에 설치해서 다는 ‘트러스 조명’이다.

조명은 다시 ‘확산형’과 ‘집중형’으로 구분된다. ‘확산형’은 벽면에 작품을 비추거나, 부스를 전체적으로 밝게 할 때 선택하고, ‘집중형’은 조각을 슬롯 머신하거나, 한 부분에 스포트라이트를 비출 때 사용한다.

조명의 색온도도 중요하다. 일반적으로는 3,000K, 3,500K, 4,000K 세 가지를 사용한다. 설치될 작품에 따라 적합한 조명을 고르면 좋은데, 옵션이 늘어날수록 일이 많아지니, 슬롯 머신에서는 일반적으로 한가지의 색온도 조명으로 통일하여 제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 바닥재
대부분은 파이텍스라고 하는 부직포 같은 재질의 바닥재를 사용한다. 옵션으로 카펫이나 타일, 시트 등을 제공한다. 바닥재를 설치할수록 부스의 퀄리티가 좋아 보이지만, 설치 비용과 자재비용이 4박 5일 짧은 기간에 운영되는 슬롯 머신에 들어가기에 높기 때문에 참가 갤러리들이 많이 고민하는 부분이다.

지금은 코엑스와 세텍의 바닥이 개선되어 깨끗해졌지만, 과거에는 바닥이 오염되어 작품을 거는 슬롯 머신에는 적합하지 못해 그런 부분을 보완하기 위해 행사장 전체에 파이텍스를 설치하는 작업을 주최 측에서 진행하기도 하였다.

□ 트러스
천장을 만들기 위해 쓰는 구조물이다. 회화 위주 출품이 많은 슬롯 머신에서는 천장 구조물이 크게 중요하지 않았으나, 점차 슬롯 머신에서도 조각이나 설치 작품들이 늘어나며 천장 구조물을 이용해 다양한 연출이 필요해졌다. 콘서트에서 사용되는 트러스 구조물을 슬롯 머신에 맞춰 사용하였으나, 최근에는 슬롯 머신 부스에 적합한 새로운 트러스 구조물도 많이 개발되어 나오고 있다.
슬롯 머신과 조명, 바닥재와 천장 구조까지 모든 요소가 잘 만들어졌던 마시모 드 카를로의 부스, 파올로 피비 작품 / 제공. 박준수
슬롯 머신과 조명, 바닥재와 천장 구조까지 모든 요소가 잘 만들어졌던 마시모 드 카를로의 부스, 파올로 피비 작품 / 제공. 박준수
프리즈 서울이 한국에 들어오며 보여준 장치와 시설들이 기폭제가 되어 한국 슬롯 머신와 협력업체들도 가벽, 조명, 바닥재, 트러스를 비롯한 장치와 시설에 개선과 발전이 적극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올해 키아프에서도 코엑스 천장의 지깅을 이용해 특별전 작품을 설치하였다. 그런 새로운 시도들이 한국 미술과 전시에 발전을 가져온다.

4. 잘 키운 오퍼레이터, 열 후원사 안 부럽다

오퍼레이터의 경험치는 아주 중요하다. 슬롯 머신를 한 번이라도 해본 경험자와 한 번도 못 해본 경험자의 차이는 매우 크다. 특히 현장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오퍼레이터들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에 얻어지는 이득이 매우 크다.

2017년 키아프 때 코엑스 슬롯 머신 규정에 어긋나는 위치에 부스가 세워진 적이 있다. 벽에서 소방 통로 확보를 위해 4m 이상을 떼야 하는데, 그것을 어기고 벽에 가깝게 붙인 것이다. 그 전년도에는 사전에 코엑스와 협의를 통해 따로 소화전과 비상구 표시를 모두 하고, 다른 방향으로 소방 통로를 확보했는데, 바뀐 담당자는 그런 협의 없이 지난해 도면과 같이 슬롯 머신를 해버린 것이다.

결국 사전 안전과 관련된 사항은 협의가 이뤄지지 않으면 승인을 할 수 없기에 다 세워진 슬롯 머신을 1.5m 정도 밀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슬롯 머신을 전부 해체해서 다시 설치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결국 현장에 있는 모든 인력이 동원되어 슬롯 머신을 통째로 밀어야했다. 다른 곳에서 설치해야 할 모든 인력이 투여되었기 때문에 결국 많은 시간이 지체되었다. 그때 담당하던 협력업체 이사님께서 말씀하셨다.

“이거 레고 아니에요. 만들었다 부수는 거 쉽지 않습니다.”

문제는 해결되었지만, 미안함에 몸 둘 바를 몰랐다. 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는 모두 금전적 손해와 직결된다. 다시는 이런 사고는 만들지 않아야겠다고 다짐했다. 현장에 오기 전에 플로어플랜 상에서 생길 수 있는 모든 문제를 방지하고자 꼼꼼하게 챙겼다.

후에 후임자로 들어와 오퍼레이션 업무를 인수인계해 준 조윤희 매니저는 이런 부분에 스페셜한 모습을 보였다. 스스로 현장에서 겪었던 부족함을 채우기 위해, 외주를 주었던 플로어플랜을 직접 만들기 위해 캐드를 배우고, 협력업체와 디테일한 부분까지 사전에 조율해 가며 안정적인 운영을 했다. 현장에서 업체 관계자들과 좋은 유대 관계를 가져가기 위한 노력도 아끼지 않았다. 키아프와 화랑미술제를 통해 다녀간 경험을 쌓고 프리즈에 2년간 몸담았던 조윤희 매니저를 프리즈에서 가장 먼저 스카웃 해간 것을 보면 프리즈에서도 오퍼레이션의 중요성을 매우 높게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잘 키운 오퍼페이터는 막대한 손실을 사전에 막아, 후원사의 후원금만큼이나 슬롯 머신에 큰 이득을 준다. 이런 전문 인력 양성이 반드시 필요하다.

5. Last out

연극이 끝나고 난 뒤, 혼자서 객석에 남아 조명이 꺼진 무대를 본 적은 없지만, 슬롯 머신가 모두 끝나고 가벽이 모두 빠져 텅 빈 슬롯 머신장에 앉아 있던 적은 있다. 오퍼레이션 담당자는 슬롯 머신가 모두 끝나고 넘어가는 가벽을 보며 다음 해 세워질 슬롯 머신를 구상한다. 오퍼레이션을 아무리 잘해도 앞에서 박수를 받지 못한다. 실수했던 부분들만 떠오르며, 그것을 개선할 방법들을 찾는다. 그렇게 매년 슬롯 머신와 한국 전시 사업은 발전해 간다.
철수를 마치고 텅 빈 컨벤션을 보며 다음 행사에 더욱 좋은 슬롯 머신를 만들 것을 계획한다. / 제공. 박준수
철수를 마치고 텅 빈 컨벤션을 보며 다음 행사에 더욱 좋은 슬롯 머신를 만들 것을 계획한다. / 제공. 박준수
박준수 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