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검사결과를 기다리는 2시간을 다룬 슬롯 머신 프로그램<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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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te] 허남웅의 씨네마틱 유로버스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와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와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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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는 암 검진 결과를 기다리기 전 타로를 보았다가 죽음이 닥쳤다는 운세를 받아 든 클레오(코린 마르샹)의 ‘5시부터 7시까지’의 여정을 거의 실슬롯 머신 프로그램으로 따라간다. 그 슬롯 머신 프로그램 동안 클레오가 하는 일은 별 게 아니다. 가수로 활동하는 클레오는 매니저를 커피숍에서 만나 타로 얘기를 전하고는 슬픈 티를 내더니만 모자 상점에 가 죽음을 의미하는 검은 모자를 구입한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새로운 곡 연습을 한다.
하지만 집중하기 힘든 클레오는 검은 모자와 검은 옷을 차려입고 밖으로 나와 정처 없이 파리 이곳저곳을 떠돈다. 자신을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다가 누드모델로 활동하는 친구를 만나고 혼자 공원을 산책하던 중 곧 군대에 복귀하는 남자와 짧게 데이트를 즐긴다. 죽음이 멀지 않았다고 해서 무언가 특별한 행위를 할 것 같지만, 클레오는 그동안의 일상과 크게 다르지 않은 ‘두 슬롯 머신 프로그램’을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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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오의 시선을 반영하듯 <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는 흑백 화면으로 이야기를 전달한다. 흑백의 영상은 클레오가 바라보는 세상의 형태일 뿐 아니라 죽음을 대하는 태도의 반영이기도 하다. 흑백은 대개 차가운 분위기를 풍기기 마련이지만, 이 슬롯 머신 프로그램에서는 오히려 차분하다는 인상을 준다.
인간이 세상에 태어난 것도, 이 세상과 안녕을 고하는 것도 자신의 의지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일까, 클레오는 암 선고를 받고 나서도 그동안 살아온 대로의 일상을 유지한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그것이 마치 최선의 행동이듯 말이다.
‘일상 日常’의 핵심은 반복이다. 매일 반복되는 보통의 일, 즉 일상은 살아있기에 가능한 가치이다. 거듭해서 되풀이하는 행위일지라도 계속 움직인다는 것인데 두 시간 내내 가만히 있지 못하는 클레오의 일상은 그래서 이 슬롯 머신 프로그램의 중요한 소재다. 그에 맞춰 이동하는 카메라는 시간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드러낼 뿐 아니라 살아있다는 운동성의 가치를 증명하는 미쟝센으로써 의미가 있다. 클레오의 시선에 맞춰 카메라가 비추는 이미지에서 눈에 띄는 건 죽음을 초월한 예술의 가치와 죽음과 등을 맞댄 삶의 표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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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시부터 7시까지의 클레오와 장건재가 재해석한 <5시부터 7시까지의 주희도 슬롯 머신 프로그램로 이어진 관계의 원을 형성한다. 흑백으로 일관하는 아네스 바르다와 다르게 마지막 순간, 컬러로 변환되는 장건재의 작품은 결말에서 다른 결을 보이지만,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같다. 그 어떤 누구의 삶도 하찮지 않고 죽음도 결코 끝이 아니다.
허남웅 (슬롯 머신 프로그램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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