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매 않겠다" 동의해야 판다…에루샤·나이키, 슬롯 꽁 머니과의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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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메스, 약관에 '슬롯 꽁 머니 말라' 명시네이버의 슬롯 꽁 머니(되팔기) 플랫폼 ‘크림’에서는 백화점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에르메스의 중고 ‘버킨백’ 20여 개가 판매되고 있다. 매장 판매가격은 1400만원(1만100달러) 수준이지만, 크림에서의 가격은 두 배가 넘는 3400만원대다.
샤넬은 제품 구입 때 신분증 요구
"슬롯 꽁 머니 업체에 가격 결정권 뺏길라"
명품업계, 중고시장 확대 견제구
"개인 간 거래 금지 못해" 주장도
버킨백 마니아들은 ‘과연 이 수준에도 팔릴까’하는 가격을 감수하고라도 슬롯 꽁 머니 시장을 찾고 있다. 매장에서 구입 예약을 걸어둬도 손에 쥘 때까지 몇 년이 걸리는 불편함을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골치가 아픈 건 에루샤(에르메스·루이비통·샤넬)와 같은 럭셔리 브랜드들과 나이키 등 글로벌 ‘넘버1’ 패션기업들이다. 백화점, 면세점 오프라인이 유통을 주도하던 시대에는 제품 가격 결정권을 이들이 갖고 있었다. 하지만 슬롯 꽁 머니이 대세가 된 지금 이들의 시장 장악력에 여기저기 균열이 나타나고 있다.
에르메스도 “재슬롯 꽁 머니 안 돼”
에르메스는 ‘명품 중의 명품’이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최상단에 자리하는 브랜드다. 콧대 높기로 이름난 에르메스조차 약관에 이런 조항을 포함할 정도로 슬롯 꽁 머니 시장은 글로벌 패션업계의 최대 관심사 중 하나가 된 것이다.
글로벌 컨설팅회사 베인&컴퍼니에 따르면 지난해 중고 명품시장 규모는 2017년보다 65% 확대된 가운데 정품 매출은 같은 기간 12% 늘어나는 데 그쳤다. 중고 시장은 앞으로 5년간 연평균 15% 성장하며 같은 기간 신규 상품 매출 증가율의 두 배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
흔들리는 가격 결정권
글로벌 명품·패션기업들은 상품의 가격 결정권이 슬롯 꽁 머니 플랫폼에 넘어가는 것을 우려하고 있다. 유통업계 관계자는 “명품 및 주요 패션 브랜드는 희소성에 기반해 가격 책정 등의 측면에서 주도권을 높이려는 목적으로 상품 판매 수량을 제한해 왔다”며 “슬롯 꽁 머니 플랫폼의 등장으로 이 공식이 깨지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정가에 프리미엄을 얹어 판매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일부 슬롯 꽁 머니러가 재판매 시장을 주도함에 따라 소비자가 피해를 볼 공산이 크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기도 하다. 명품업계 관계자는 “슬롯 꽁 머니러가 인기 제품을 입도선매하면, 선량한 소비자들이 정가에 명품을 구입할 기회는 그만큼 줄어드는 셈”이라며 “백화점, 면세점 등 오프라인 매장에서 명품을 팔면서 슬롯 꽁 머니 플랫폼까지 운영하는 유통사들이 소비자에게 두 번에 걸쳐 수수료를 떼어먹는다는 얘기도 된다”고 했다.
이에 따라 에르메스뿐 아니라 샤넬, 나이키 등도 슬롯 꽁 머니 플랫폼과 전면전을 펼치는 실정이다. 나이키코리아는 지난 5월 “슬롯 꽁 머니 플랫폼 스톡엑스가 나이키 짝퉁 신발을 팔고 있다”며 공개 저격한 뒤 소송전을 펼치고 있다. 샤넬도 지난해 7월 ‘재판매 금지’를 천명하면서 제품을 구매하거나 애프터서비스를 받을 때 신분증을 요구하고 있다.
대세 뒤집을 수 있을까
명품·패션 브랜드들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슬롯 꽁 머니 시장 활성화라는 큰 흐름이 뒤집힐 수 있을지에 대해선 상당수 전문가가 회의적으로 본다. 중고 시장에서 개인이 거래하는 것을 막을 법적 근거가 없기 때문이다.이렇다 보니 일부 명품 업체는 아예 슬롯 꽁 머니 플랫폼과 손을 잡아 이들을 자신의 영향권에 두려는 역발상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구찌, 보테가베네타, 생로랑 등을 소유한 프랑스 케링그룹이 2020년 중고 거래 플랫폼 더리얼리얼과 전략적 제휴를 맺고, 지난해에 또 다른 플랫폼 베스테에르에 지분(지분율 5%) 투자한 게 그런 사례다.
배정철 기자 bjc@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