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지난해 6월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정부·여당은 장시간 노동 사회로 되돌아가자는 말인가”라며 “민주당은 결코 제도 개악에 협조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당시 경제사회노동위원회가 업종별 주 52시간 근로 유연화 논의를 시작하자 이를 강하게 비판한 것이다. 작년 11월 국민의힘에서 반도체업계의 숙원으로 평가받는 ‘화이트칼라 이그젬션’(주 52시간제 슬롯 사이트)을 포함한 반도체특별법 제정안을 내놨을 때도 이 대표는 침묵을 지켰다.

근로시간 유연화에 완강했던 이 대표가 입장을 바꿨다. 이 대표는 3일 민주당이 개최한 반도체특별법 토론회에서 좌장을 맡아 “반도체산업에 한정해 고소득 연구개발(R&D) 직원이 원할 경우 주 52시간제 적용 슬롯 사이트를 한시적으로 허용하는 방안을 생각해 보겠다”며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수용 가능성을 시사한 것이다. 중국 인공지능(AI) 스타트업 딥시크 쇼크와 미국 도널드 트럼프 2기 행정부의 관세 정책 등으로 국내 반도체업계가 사면초가에 빠진 뒤에야 뒤늦게 대안 마련에 나섰다는 지적이 나왔다.

근로 유연성 부여 공감한 李

지난 3일 국회에서 열린 반도체특별법 토론회에 참석한 이재명 대표(오른쪽)와 박찬대 원내대표(왼쪽). /사진=강은구 기자
지난 3일 국회에서 열린 반도체특별법 토론회에 참석한 이재명 대표(오른쪽)와 박찬대 원내대표(왼쪽). /사진=강은구 기자
이 대표는 이날 토론회에서 “10만달러 이상의 고소득 전문 연구개발자에게 총 노동시간을 늘리지 않고 본인이 동의하는 조건에서 특정 시기에 집중하는 정도의 유연성을 부여하자는 것에 공감한다”고 여러 차례 강조했다. 그는 “경제계에서 특정 산업의 연구개발 분야 고소득 전문가들이 동의할 경우 슬롯 사이트로 몰아서 일하게 해주자는 게 왜 안 되냐고 물어보니 할 말이 없더라”고도 했다. 당내에선 이 대표가 화이트칼라 이그젬션에 긍정적인 입장을 내놨다는 평가가 나왔다.

이날 토론회에서 반도체업계는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도입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김재범 SK하이닉스 R&D 담당은 “다양하고 예측하기 어려운 글로벌 고객사 요구에 빠르게 대응하기 위해선 핵심 R&D 직원의 근무시간 자율성이 늘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김태정 삼성글로벌리서치 상무는 “전문 R&D 직원은 핵심 인력 자산인 만큼 화이트칼라 이그젬션이 도입되면 처우 개선은 물론 건강권 보호 등에도 더욱 집중할 것”이라고 했다. 하지만 노동계 측 참석자들은 “R&D 외 다른 직원, 다른 산업 분야로도 뻗어나갈 수 있다”며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도입을 반대했다.

당내선 ‘추후 논의’ 입장 여전

이 대표가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도입에 우호적인 인식을 드러냈지만, 곧바로 입법화가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우선 전통 지지층인 노동계의 반발이 매우 크다. 양대 노총은 이날 토론회 직후 기자회견을 열어 “이 대표가 실용주의와 성장주의를 운운하며 노동자들과 약속을 저버리고 정권 창출에만 혈안이 돼 친기업·반노동 정책을 추진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당내 노동계 출신 의원을 중심으로도 반발이 만만치 않을 전망이다. 한 수도권 재선 의원은 “노동계 반대가 너무 심해 아무리 취지가 좋아도 민주당이 수용하긴 어렵다”고 했다.

이 대표는 화이트칼라 이그젬션을 도입하더라도 R&D 투자 등에 대한 세제 지원을 강화하는 내용을 우선 처리할 슬롯 사이트가 있다는 입장이다. 이는 국민의힘 주장과 차이가 있다. 국민의힘은 반도체특별법에 세제 지원 강화와 인프라 구축에 대한 국가 책임을 의무화하는 데서 나아가 화이트칼라 이그젬션 도입을 모두 담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국민의힘과 정부는 4일 국회에서 당정협의회를 열고 반도체 연구 인력 주52시간 적용 슬롯 사이트를 논의한다고 밝혔다.

배성수/최형창/이슬기 기자 baeba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