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담과 이브(1909). 이브가 적극적으로 사과를 따려고 하는 반면 아담은 소심하게 이를 제지하고 있는 모습이다. 대범하고 시원시원한 슬롯사이트 볼트의 연애는 대개 이런 구도로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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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기요, 계십니까! 좀 나와보세요!”

1909년 어느 여름날 밤, 프랑스 파리 근교의 커다란 저택 앞. 대문을 쿵쿵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나온 중년 여성은 낯선 청년과 마주쳤습니다. 청년의 옆에는 슬롯사이트 볼트의 아들이 술에 만취해 축 늘어져 있었습니다. “저는 아드님 친구인데요, 술을 마시고 너무 취해서 제가 데려왔습니다.” “참, 매번 이게 뭐 하는 짓인지…. 고마워요. 다음에 밥이나 한 번 먹으러 와요.”

어머니와 아들의 친구가 한 번쯤 나눌 법한 평범한 대화. 그런데 둘 사이의 분위기가 왠지 이상했습니다. 슬롯사이트 볼트가 아들을 부축해 들어간 뒤에도, 청년은 닫힌 대문 앞에서 한참을 서 있었습니다. 청년은 훗날 회고했습니다.“내가 꿈꾸던 여인을 만났다”라고요. 가슴이 뛰었던 건 슬롯사이트 볼트도 마찬가지. 슬롯사이트 볼트는 이렇게 적었습니다.“그를 만나고 두 번째 청춘이 찾아왔다.”

슬롯사이트 볼트의 이름은수잔 슬롯사이트 볼트(1865~1938). 나이는 44세였습니다. 반면 청년 앙드레 우터(1886~1948)는 고작 23세로, 슬롯사이트 볼트보다 스물한 살이나 어렸습니다.심지어 그는 슬롯사이트 볼트의 아들보다도 세 살 아래였습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이들의 사랑은 세계 예술계에 하나의 혁명을 일으키게 됩니다.‘몽마르트르의 여인’으로 불렸던 화가 수잔 슬롯사이트 볼트의 예술과 파란만장한 삶, 그리고 사랑 이야기.

어머니라는 이름

‘아버지: 없음.’

1865년 9월 제출된 슬롯사이트 볼트의 출생증명서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습니다. 그 시절 가난한 프랑스 시골 마을에서 이런 기록은 ‘사형 선고’로 받아들여지곤 했습니다. 태어난 아기 100명 중 4명이 버려지던, 먹고 살기 힘든 시대. 아버지가 버린 아이를 홀로 맡아 키우는 어머니는 극히 드물었습니다.

슬롯사이트 볼트의 어머니 마들렌은 달랐습니다. 그녀는 남자 복이 없었습니다. 스물일곱에 첫 남편을 잃고 아이 하나를 키우던 그녀는 철도를 놓으러 마을에 온 기술자와 사랑에 빠졌지만, 그는 배 속의 아기만 남겨둔 채 떠나버렸습니다. 마들렌의 친척들은 넌지시 말했습니다. “아기를 포기해. 지금 키우고 있는 아이라도 잘 키워야 하지 않겠니.” 그녀가 가난한 ‘싱글맘’ 세탁부였기 때문이었습니다.하지만 마들렌에게는 책임감과 대범함, 그리고 자신의 아이에 대한 무조건적인 사랑이 있었습니다.
르누아르가 그린 '부지발의 춤'. 여성의 모델은 발라동이다. 1883년 아내를 모티브로 그린 '시골 무도회'와는 다른 작품이다. 당시 소문에 따르면, 처음에 르누아르는 '시골 무도회'에도 발라동의 얼굴을 그려넣었다. 하지만 아내의 성화에 못이겨 그 위에 아내의 얼굴을 덧그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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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현실의 벽은 높았습니다. 슬롯사이트 볼트의 월급으로는 두 아이를 키우기 턱없이 부족했습니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살림은 쪼들렸습니다. 이대로는 버틸 수 없었습니다. 그러던 마들렌의 눈에 들어온 건 파리행 열차.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이었지만, 그곳에는 좀 더 나은 일자리와 기회가 있었습니다. 한 달 내내 빨래를 해서 번 월급을 모두 털어 기차표를 샀습니다. 그리고 마들렌과 두 아이는 기차로 열다섯 시간을 달린 끝에 파리에 도착했습니다.

이들이 정착한 곳은 몽마르트르의 언덕배기. 지금 전 세계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이곳은 당시 파리의 ‘달동네’였습니다. 술집과 유흥시설이 즐비한 이곳은 결코 아이를 키우기 좋은 곳이 아니었습니다. 그래도 몽마르트르는 월세가 낮았고, 밥값이 저렴슬롯사이트 볼트.

장점은 한 가지 더 있었습니다.이곳은 모네와 마네 등 인상주의자들을 비롯한 수많은 예술가가 모여드는 ‘예술의 성지’였습니다.“엄마, 저거 봐!” 다섯 살배기 슬롯사이트 볼트 그림을 그리는 화가들 옆에 앉아 그들의 붓질을 한참 바라보곤 했습니다. 거리에서 주운 연필과 숯 조각으로 이리저리 그림을 그려 보기도 했습니다. 아이를 두고 일을 나가야 하는 마들렌의 무거운 마음도, 발라동이 그림에 집중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조금이나마 가벼워졌습니다. 그렇게 몽마르트르의 거리는 마들렌과 함께 발라동을 키웠습니다.
창문 앞의 슬롯사이트 볼트 소녀(1930).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미술관
창문 앞의 슬롯사이트 볼트 소녀(1930). /캘리포니아주 샌디에이고 미술관

예술을 사랑하다

슬롯사이트 볼트 어머니의 성격을 쏙 빼닮았습니다. 그녀는 에너지가 넘쳤고, 겁이 없었고, 고집이 셌습니다. 몽마르트르의 주민들은 날랜 몸놀림으로 거리를 쏘다니며 위험한 장난을 치는 발라동을‘몽마르트르의 작은 공포’라고 불렀습니다.

급기야 말괄량이 슬롯사이트 볼트 학교에서도 퇴학당하고 맙니다. 마들렌이 없는 살림을 쥐어짜 보낸 학교였습니다. 마들렌은 눈물을 흘렸습니다. “너는 나처럼 되지 않았으면 했는데….” 어린 시절의 마들렌이 그랬고 다른 몽마르트르의 아이들이 그렇듯이, 학교에서 쫓겨난 발라동이 갈 곳은 푼돈을 받는 일자리뿐이었거든요.
버려진 인형(1921). 사춘기 소녀의 복잡한 내면과 성장, 그리고 중노년 여성의 성숙과 노화를 대비시킨 작품이다.
버려진 인형(1921). 사춘기 소녀의 복잡한 내면과 성장, 그리고 중노년 여성의 성숙과 노화를 대비시킨 작품이다.
꽃다발(1930). 슬롯사이트 볼트 견습 재봉사, 웨이트리스, 주방 보조, 과일 판매원, 화환을 만드는 공장 노동자 등 다양한 직업을 경험했지만 결국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이때 경험은 훗날 그의 작품에 많은 도움을 주게 된다.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
꽃다발(1930). 슬롯사이트 볼트 견습 재봉사, 웨이트리스, 주방 보조, 과일 판매원, 화환을 만드는 공장 노동자 등 다양한 직업을 경험했지만 결국 제대로 적응하지 못했다. 이때 경험은 훗날 그의 작품에 많은 도움을 주게 된다.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
그런데 그녀에게는 어머니를 닮은 점이 또 하나 있었습니다. 넘치는 열정이었습니다. 그런 그녀의 사랑이 처음으로 향한 곳은 서커스. 당시 파리 사람들에게 서커스는 지금의 넷플릭스와 유튜브를 합친 것보다 흥미진진한 최고의 볼거리였습니다. 아름다움과 즐거움, 자유와 예술성이 어우러진 종합 예술이기도 했지요. 서커스단에 입단한 슬롯사이트 볼트 공중그네를 타게 됩니다. 화려한 무대 의상을 입고 날아다니며 관객들의 환호를 받는 그 순간을, 슬롯사이트 볼트 진심으로 사랑했습니다.

행복도 잠시. 어느 날 리허설 도중 그녀는 발을 헛디뎌 공중에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이때 입은 허리 부상으로 그녀는 더 이상 서커스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때 다치지 않았으면 나는 아마 평생 서커스를 했을 거야.” 훗날 슬롯사이트 볼트 말했습니다.

하지만 이 사고는 발라동을 미술로 이끌게 된 운명적인 계기가 됐습니다. 허리를 다쳐 누워 있는 동안 슬롯사이트 볼트 그림을 그리며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생각했습니다. ‘그림 모델을 하면 돈을 괜찮게 번다던데, 한번 해 볼까?’ 화가가 되고 싶어서는 아니었습니다. 겁 없고 고집 센 발라동조차 감히 상상하지 못할 정도로, 가난한 하층민 여성이 화가가 된다는 건 유례가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자화상(1883). 슬롯사이트 볼트 자신을 치장하는 데 별로 관심이 없었다. 평소에도 화장이나 액세서리를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 외모에 대한 일종의 자신감이기도 했고, 남에게 보이는 것보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중시하는 성격의 반영이기도 했다. /퐁피두센터
자화상(1883). 슬롯사이트 볼트 자신을 치장하는 데 별로 관심이 없었다. 평소에도 화장이나 액세서리를 거의 하지 않았다고 한다. 외모에 대한 일종의 자신감이기도 했고, 남에게 보이는 것보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중시하는 성격의 반영이기도 했다. /퐁피두센터

모델, 화가가 되다

모델 일은 슬롯사이트 볼트의 생각보다 더 잘 풀렸습니다. 화가에게 선택받으려면 젊고 아름다워야 했고, 지시에 맞춰 하나의 자세를 몇 시간이고 취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아름다운 외모와 함께 서커스로 단련된 체력을 갖춘 그녀에게는 어렵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얼마 안 돼 슬롯사이트 볼트의 아름다움과 모델로서의 재능은 파리 미술계에 널리 알려졌습니다.

파리 미술계의 거물인 샤반느의 그림에서 슬롯사이트 볼트는 예술의 여신으로 등장했습니다. 보이테크 하이나이스의 그림에서는 진실의 여신이 되었고, 구스타프 베르트하이머의 그림에서는 세이렌이 되었지요. 르누아르의 걸작 ‘부지발의 춤’에서는 무도회의 생동감 넘치는 주인공이 되었습니다.슬롯사이트 볼트 예술가들의 사랑을 받았고, 때로는 그들과 연인 관계로 발전하기도 했습니다.
구스타프 베르트하이머의 '세이렌의 키스'(1882). 발라동은 선원을 유혹하는 세이렌의 모델이었다. /인디애나폴리스미술관
구스타프 베르트하이머의 '세이렌의 키스'(1882). 슬롯사이트 볼트 선원을 유혹하는 세이렌의 모델이었다. /인디애나폴리스미술관
슬롯사이트 볼트을 모델로 그린 르누아르의 '머리 땋기'.
슬롯사이트 볼트을 모델로 그린 르누아르의 '머리 땋기'.
하지만 슬롯사이트 볼트이 온 마음을 쏟는 곳은 따로 있었습니다. 화가의 연인이나 모델이 아닌,화가 그 자체가 되고 싶다는 꿈이었습니다.그림 속의 자신을 보며 발라동의 마음은 점점 커져갔습니다. 화가들이 보는 대로가 아니라, 자기식대로 본 세상을 표현하고 싶다는 열망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녀는 화가들의 작업을 지켜보며 훔치듯 그림 기술을 배웠습니다. 붓을 잡는 법, 물감을 섞는 법, 빛과 그림자를 표현하는 법까지. 직접 그림을 그려 보던 슬롯사이트 볼트 깨달았습니다. 서커스에서 공중을 날아다니던 기분보다 캔버스를 채우는 기쁨이 더 크다는 것을요.

그녀의 미술 재능을 처음 제대로 알아본 사람은 연인이었던 ‘몽마르트르의 작은 거인’ 앙리 드 툴루즈 로트레크. 신체적 장애를 타고난 로트레크는 다른 사람들의 편견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자신부터 다른 사람에게 편견을 갖지 않기로 했습니다. 슬롯사이트 볼트이 스물두 살이던 1887년, 우연히 그녀의 그림을 봤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른 평범한 화가들과 달리 ‘여자가 그린 그림’에 선입견이 없었던 그는 솔직담백한 평가를 내놨습니다. “이거 정말 대단한데! 에드가 드가가 이걸 봐야겠어.”

얼마 뒤, 슬롯사이트 볼트 자신이 그린 그림을 들고 로트레크와 함께 드가의 앞에 섰습니다. 자신감 넘치는 발라동도 이날만큼은 바짝 긴장해 얼어 있었습니다. 드가는 발라동이 가장 존경하는 거장이었습니다. 게다가 그는 냉소적이었고, 평소 여성들을 무시하는 언행을 할 때가 많았고, 다른 사람의 그림, 특히 제대로 기초를 교육받지 않은 사람의 그림을 아주 가혹하게 비판하기로 유명했습니다. “그래요. 그림을 한 번 줘 보세요.” 아무런 표정도 없이 무미건조하게 말하는 드가에게, 슬롯사이트 볼트 떨리는 손으로 자신의 그림을 건넸습니다.
로트레크가 발라동을 모델로 그린 숙취(1888). 슬롯사이트 볼트 한때 로트레크와 결혼을 꿈꿨다. 비록 장애가 있긴 하지만 로트레크는 부유한 귀족 출신이었고, 지성과 유머감각이 빼어났기 때문이다. 슬롯사이트 볼트 로트레크와의 결혼을 위해 자살 소동까지 벌였다. 하지만 로트레크는 부담을 느끼고 도망가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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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기쁨(1911). 고갱이나 세잔의 작품과 느낌이 일부 유사하다. 선의 표현은 드가와 로트레크와 유사점이 보인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놓고 봤을때 슬롯사이트 볼트의 화풍은 독창적이다. /메트로폴리탄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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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가는 한참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슬롯사이트 볼트의 그림을 뚫어져라 바라봤습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드가의 시선이 그림에서 슬롯사이트 볼트으로 옮겨 갔습니다. 그리고 드가는 중얼거리듯 말했습니다.“당신도 우리 같은 화가 중 하나로군요.”훗날 슬롯사이트 볼트 회고했습니다.“드가의 그 말이 나에게 날개를 달았다.”

그 말대로였습니다. 화가로서 슬롯사이트 볼트의 커리어는 이후 날아올랐습니다. 슬롯사이트 볼트의 재능을 높게 산 드가는 그녀의 그림 선생님이자 홍보대사를 자처했습니다. 화가 최고의 영예인 ‘프랑스 국립미술협회 전시회’(Salon de la Societe Nationale des Beaux-Arts)에 슬롯사이트 볼트이 여성 화가 중 역대 최초로 그림을 출품할 수 있게 도운 것도 드가였습니다.하층민 출신의 여성 화가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위대한 성취였습니다. 드가는 그렇게, 슬롯사이트 볼트에게 ‘그림을 그리는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알려준 스승이었습니다.

발라동의 그림에는 이상한 매력과 독창성이 있습니다. 드가를 비롯한 당시 사람들이 충격까지 받았을 정도로요. 이유는 이렇습니다. 발라동이 등장하기 전까지 여성은 그저 남성에게 ‘보여지고 그려지는’ 대상이었습니다. 남성 화가들은 제멋대로 자신의 취향에 맞춰 그림을 그리곤 했습니다. 똑같은 모델을 그려도 풍만한 몸매를 좋아하는 화가는 풍만하게, 날씬한 몸매를 좋아하는 화가는 날씬하게 그리는 식이었습니다. 오랫동안 화가들의 모델로 일하며 슬롯사이트 볼트 그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푸른 숄을 두른 누드(1930). 그녀는 늘 보이는 그대로 사람을 그렸다. 어떤 상황에서도 슬롯사이트 볼트 이 원칙을 지켰다. /운터린덴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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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슬롯사이트 볼트 자신의 몸을 있는 그대로 그렸습니다. 부드럽고 우아한 곡선 대신 날것 그대로의 육체를, 이상적인 ‘포즈’ 대신 일상적인 ‘몸짓’을 그림에 담았습니다. 그녀의 그림 속 여성들은 때로는 피곤에 지친 모습이었고, 때로는 투박하고 거칠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생생한 진실이 담겨 있었습니다. 자화상부터가 그랬습니다. 아름답게 포장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과 마주한 화가의 모습. 당대의 미술 비평가들은 그녀의 그림을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슬롯사이트 볼트의 그림에는 거짓이 없다.”

제멋대로 슬롯사이트 볼트

이런 솔직함은 슬롯사이트 볼트의 삶 자체를 닮아 있었습니다. 그녀는 제멋대로였습니다.감정에 휘둘렸고, 내키는 대로 행동했으며, 연애도 마구 슬롯사이트 볼트.하지만 슬롯사이트 볼트 언제나 진심을 다했고, 자신의 선택에는 반드시 책임을 졌습니다.1883년, 열여덟 살의 발라동이 임신 사실을 알게 됐을 때도 그랬습니다.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냐는 질문에 슬롯사이트 볼트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그녀 자신도 몰랐을지 모릅니다.
수잔 슬롯사이트 볼트과 위트릴로의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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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스 우트릴로의 초상(1921). 그의 옛 연인 중 하나이자, 발라동의 아들에게 자신의 성을 쓰도록 허락해준 남자기도 하다. 슬롯사이트 볼트 연인과 헤어진 뒤에도 그들의 모습을 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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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계에서의 커리어가 망가질 수도 있는 위기였습니다. 하지만 그녀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아이를 키우기로 했습니다. 마들렌이 그랬던 것처럼요. 그렇게 태어난 아들이 모리스 위트릴로(1883~1955). 위트릴로는 슬롯사이트 볼트이 만난 연인 중 한 명으로, “당신의 성을 써도 되겠느냐”는 질문에 흔쾌히 “좋다”고 말한 화가였습니다.

이런 발라동도 슬럼프에 빠질 때가 있었습니다. 서른네 살이던 1896년, 자신을 8년이나 쫓아다니던 부유한 은행가 폴 무시스와 결혼한 뒤였습니다. 아이가 있었지만 여전히 발라동에게 구애하는 매력적인 남자는 수없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슬롯사이트 볼트 무시스를 택했습니다. 그간 고생한 어머니를 편히 모시고 아들을 잘 키우기 위해서였습니다.
화가의 어머니(1912). 마들렌의 노년기 모습이다.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
화가의 어머니(1912). 마들렌의 노년기 모습이다.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
하지만 넓은 저택과 부족함 없는 생활은 발라동의 마음을 좀먹었습니다. 집안을 관리하고 하인들을 감독하는 등 남편을 내조하는 일은 그녀에게 너무나도 지루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슬롯사이트 볼트 무시스에게 열정적인 사랑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림을 그릴 시간도 부족했지만, 그림을 그릴 마음이 나지 않는 게 더 큰 문제였습니다. 이런 세월이 10년 넘게 흐르자 드가는 발라동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습니다. “계속 당신의 그림이 도착하는 걸 기다리고 있는데, 영 오질 않네요. 그러는 사이 나는 늙어가고 있습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 발라동이 마흔네 살이 되던 1909년. 그녀는 우연히 만나게 된 아들의 친구 우터와 사랑에 빠지게 됩니다. 우터는 젊고 매력적일 뿐더러 발라동의 예술을 깊이 이해했고, 그녀의 재능을 숭배했습니다. 그런 우터와 만나며 발라동의 창작열은 다시 불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실을 알아챈 무시스는 당연히 분노했고, 이혼을 요구했습니다. 지은 죄가 명백한 만큼 슬롯사이트 볼트 모든 것을 무시스가 원하는 대로 처리했습니다.
그물 던지기(1914). 남성의 누드를 그린 이 작품은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지금도 세계 주요 미술관에 걸린 누드 슬롯사이트 볼트의 절대 다수가 남성이 아닌 여성 누드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다. /낭시미술관
그물 던지기(1914). 남성의 누드를 그린 이 작품은 당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지금도 세계 주요 미술관에 걸린 누드 슬롯사이트 볼트의 절대 다수가 남성이 아닌 여성 누드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다. /낭시미술관
우터와 함께한 새로운 삶은 슬롯사이트 볼트에게 예술적 전성기를 가져다줬습니다.그의 존재는 발라동에게 새로운 영감을 불어넣었습니다. 작품은 더욱 대담해졌습니다. 당시까지 여성 화가가 남성 누드를 그린다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슬롯사이트 볼트 늘 그랬듯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했습니다. ‘그물 던지기’에서는 남성들의 누드를 그렸고, ‘아담과 이브’에서는 여성과 남성의 역할을 뒤집어 버렸습니다. 슬롯사이트 볼트 말했습니다.“나는 그저 내가 보는 대로 그렸을 뿐이에요. 남자든 여자든, 우리는 모두 같은 인간이니까요.”

1920년대, 50대에 접어들며 슬롯사이트 볼트 마침내 자신이 꿈꾸던 것들을 이뤘습니다. 그녀는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했고, 그림으로 세상과 소통했으며, 경제적 자유도 얻었습니다. 그림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갔습니다. 성(城)을 사고 호화로운 파티를 열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몽마르트르의 작은 식당들을 즐겨 찾았고, 점원이 감동해 울음을 터뜨릴 만큼 후한 팁을 남기곤 했습니다.
가슴을 드러낸 자화상(1931). 66세때 그린 작품이다. 꾸미지 않은 말 그대로 날것의 모습이지만, 있는 그대로 자신을 보여주겠다는 마음가짐과 한 인간으로서의 은은한 자신감이 잘 드러나 있다.
가슴을 드러낸 자화상(1931). 66세때 그린 작품이다. 꾸미지 않은 말 그대로 날것의 모습이지만, 있는 그대로 자신을 보여주겠다는 마음가짐과 한 인간으로서의 은은한 자신감이 잘 드러나 있다.
푸른 방(1923). 전통적인 서양화 속 여성의 자세지만 그 모습은 정반대다. 짧고 느슨한 드레스를 입고, 단발머리를 하고,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담배를 입에 문 이 여성의 모습은 의도적으로 고정관념을 비튼 것이다. 이 작품은 후대 모든 여성 예술가에게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
푸른 방(1923). 전통적인 서양화 속 여성의 자세지만 그 모습은 정반대다. 짧고 느슨한 드레스를 입고, 단발머리를 하고, 남성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담배를 입에 문 이 여성의 모습은 의도적으로 고정관념을 비튼 것이다. 이 작품은 후대 모든 여성 예술가에게 영향을 끼쳤다. /프랑스 국립현대미술관
부와 명예를 얻어도 슬롯사이트 볼트 결코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았습니다. 1915년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슬롯사이트 볼트 죽을때까지 그리워했습니다. 발라동을 성공으로 이끈 건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것들이었으니까요. 세상의 편견에 맞서 딸을 지키고, 더 나은 삶을 위해 용감히 파리행을 선택했던 어머니 마들렌 말입니다.

마들렌처럼 슬롯사이트 볼트도 자신만의 길을 뚜벅뚜벅 걸었습니다. 붓을 든 채 쓰러져 7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그를 기리는 기념 동전에는 세 단어가 새겨졌습니다. ‘주고, 사랑하고, 그리다(Donner, Aimer, Peindre)’. 그리고 그 세 단어는 다시 한번 이어지게 됩니다. 몽마르트르가 낳은 또 다른 화가. 슬롯사이트 볼트에게 커다란 고통만큼이나 큰 행복을 안겨준, 그녀의 아들 모리스 위트릴로의 이야기로요.

*다음 주 위트릴로 편(후편)으로 이어집니다.
수잔 슬롯사이트 볼트 사후 그녀를 기념해 발행된 동전의 앞면(왼쪽)과 뒷면. 뒷면에는 세 단어가 새겨져 있다.
수잔 슬롯사이트 볼트 사후 그녀를 기념해 발행된 동전의 앞면(왼쪽)과 뒷면. 뒷면에는 세 단어가 새겨져 있다.
**이번 기사는 Renoir's Dancer: The Secret Life of Suzanne Valadon(Catherine Hewitt 지음), Mistress of Montmartre: A Life of Suzanne Valadon(June Rose 지음), 수잔 슬롯사이트 볼트, 그림 속 모델에서 그림 밖 화가로(문희영 지음) 등을 참조해 작성했습니다.

<그때 그 사람들은 미술 담당 기자가 미술사의 거장들과 고고학, 역사 등을 심도 있게 조명하는 연재물입니다. 매주 토요일 새로운 이야기로 찾아옵니다.네이버 기자 페이지를 구독하시면 미술 소식과 지금 열리는 전시에 대한 평가, 심층 분석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이미 구독 중인 6만여명의 독자와 함께 아름다운 작품과 이야기를 만나보세요.앞서 다뤘던 화가들의 이야기와 아름다운 슬롯사이트 볼트들은 두 권의 책 <명화의 탄생, 그때 그 사람과 <명화의 발견, 그때 그 사람을 통해 곁에 두고 즐길 수도 있습니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