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곤 슬롯 꽁 머니 ‘친구들(원탁)’
에곤 실레 슬롯 꽁 머니;친구들(원탁)’
세상이 혼란할 때, 슬롯 꽁 머니을 생각한다. 세기를 건너 위대한 명작이 된 슬롯 꽁 머니 작품은 상당수가 혼돈 속에서 피어났다.

스페인 내전의 비극을 그려낸 피카소의 대작 ‘게르니카’가 그랬고, 쇼스타코비치의 교향곡도 스탈린 정권의 억압 아래 탄생했다.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와 실내악 작품, 일부 교향곡 역시 전쟁으로 인한 인간의 고뇌에서 비롯한 슬롯 꽁 머니적 산물이다. 나치의 탄압에 움츠러들었지만 ‘사람들을 다시 꿈꾸게 하기 위해’ 창작에 몰입한 디자이너 크리스티앙 디오르와 코코 샤넬의 이야기는 또 어떤가. 영화, 문학, 건축에 이르기까지 새로운 시대는 늘 과거를 딛고 일어났다.

어떤 슬롯 꽁 머니에게 창작은 곧 생존이다. 사람들을 다시 꿈꾸게 하고, ‘인간다움’을 회복하는 것, 그렇게 동시대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앞으로 나아가자고 외치는 아름다운 목소리들이 어느 시대에나 존재했다.

여기 1900년대 오스트리아 빈의 이야기가 있다. 진부하고 보수적이던 도시의 문화를 예술로 타파하고자 한 슬롯 꽁 머니들이다. ‘황금의 화가’로 잘 알려진 구스타프 클림트는 시대의 지성이자 사상가였다. 슬롯 꽁 머니들의 구심점으로 과거와 우리를 분리시키자는 ‘빈 분리파’를 만들어 사람들을 깨웠다. “예술의 자유를 되찾자”는 구호는 모든 혁신과 도전이 그렇듯 당대에는 반발과 비판에 시달려야 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다음 세대의 슬롯 꽁 머니들에게 거대한 뿌리가 됐다. 빈 분리파는 음악, 미술, 공예, 디자인, 문학과 연극 등 존재하는 모든 예술을 하나로 통합했고 현대 디자인과 건축, 공예와 예술의 씨앗이자 거름이 됐다.

1900년대 빈의 슬롯 꽁 머니들은 함께했다. 끈끈하게 연대하며 원대한 미래를 바라봤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비엔나 1900, 꿈꾸는 슬롯 꽁 머니들’ 전시에 그 이야기가 녹아 있다. 클림트와 에곤 실레를 포함해 요제프 호프만과 콜로만 모저, 오스카어 코코슈카와 리하르트 게르스틀까지 빈 분리파의 중추였던 슬롯 꽁 머니 6명을 만나는 것은 어쩌면 지금 우리가 어디에 서서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막막한 이들에게 던지는 삶의 철학서와 같다.

이 전시의 첫 번째 작품인 실레의 빈 분리파 제49회 전시 포스터는 1918년에 그려졌다. 슬롯 꽁 머니;친구들(원탁)’이라는 제목의 이 포스터는 그림 맨 상단의 자신과 마주 보고 있는 클림트의 뒷모습을 그려 넣은 유화가 원작이다. 그해 클림트의 죽음을 애도하며 빈자리를 남겨둔 채 석판화로 제작한 이 포스터는 말한다. 어떤 비극과 혼돈에도 각자가 선 자리에서 묵묵히 나아가라고. 그리고 꿈을 꾸라고.

고리타분한 미술에 맞선 빈 분리파…그 뒤엔 스타 화가가 있었다
황제 훈장까지 받은 거장 클림트, 기존 틀을 깬 '혁신 아이콘'으로

절망 속에서 욕망을 꿈꾸던 비엔나의 슬롯 꽁 머니를 만나다
구스타프 슬롯 꽁 머니 ‘국립극장의 계단 벽화를 위한 습작’(1886)
구스타프 클림트 슬롯 꽁 머니;국립극장의 계단 벽화를 위한 습작’(1886)
19세기 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 빈은 세계에서 문화적으로 가장 보수적인 도시였다. 전 유럽을 600년간 호령해온 제국의 역사와 전통, 자부심이 모든 새로운 것들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이런 농담이 돌 정도였다. “지구가 종말한다면 빈으로 가라. 무슨 일이든 50년 늦게 벌어지는 그곳에는 종말도 뒤늦게 찾아올 테니.”

그랬던 빈은 20세기 초 갑작스레 유럽 미술의 최전선으로 변신한다. “구스타프 클림트, 에곤 실레 등 전통을 현대의 자양분으로 삼아 매혹적인 미술을 만들어낸 빈 분리파 슬롯 꽁 머니들 덕분”(양정무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이다. 이 천재 작가들은 서울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리고 있는 특별전 ‘비엔나 1900, 꿈꾸는 슬롯 꽁 머니들’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탁월한 재능과 노력으로 예술의 새 장을 연 빈 분리파 대표 슬롯 꽁 머니 여섯 명의 삶과 업적을 정리했다.

빈 분리파의 ‘분리’는 고리타분한 전통 미술에서 벗어나 새로운 슬롯 꽁 머니을 추구하겠다는 뜻이다. 그저 그런 2류 작가들이 이런 선언을 했다면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빈 분리파를 결성한 주역 중에서는 클림트(1862~1918)가 있었다. 그는 전통적인 미술에서 두각을 드러내 황제에게 상과 훈장까지 받은, 당대 최고의 화가이자 슈퍼스타였다. 그런 클림트가 초대 회장으로 나서자 빈 분리파의 무게감이 확 올라갔다.

클림트의 인기는 대단했다. 그림값이 집 한 채 값과 맞먹을 정도로 비쌌지만 사려는 사람이 줄을 섰다. 이 덕분에 그는 많은 돈을 벌었다. “대중의 입맛에 맞추지 않겠다”고 선언하는 자신감도 이런 재정적 성공에서 나왔다. 인격적으로도 훌륭했다. 에곤 실레 등 후배 슬롯 꽁 머니들을 살뜰히 챙겼다. 여성들에게 인기도 많았다.

하지만 그의 삶이 늘 장밋빛이었던 건 아니다. 어린 시절에 찢어지게 가난했고, 작가로서의 성공을 뒷받침해준 동생 에른스트 클림트가 스물여덟 살의 나이에 병으로 요절하는 걸 지켜봐야 했다. 화가로서 성공을 거둔 뒤에는 정신 질환을 앓는 어머니와 여동생들과 평생 함께 살며 챙겼다. 진정으로 사랑했던 연인(에밀리 플뢰게)과의 결혼을 원했지만 거절당하기도 했다. 그런 클림트에게 슬롯 꽁 머니은 삶의 이유이자 인생의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는 도피처와도 같은 존재였다.

클림트를 상징하는 금박을 사용한 대형 작품은 전시장에 없다. 대신 좀처럼 보기 어려운 그의 초기작들이 나와 있다. 클림트의 탁월한 기본기를 확인할 수 있는 슬롯 꽁 머니;국립극장의 계단 벽화를 위한 습작’이 대표적이다. 소형 초상화들도 만날 수 있다. 인상주의에 영향을 받아 새로운 구도와 효과를 실험한 흔적이다.

거대한 저택 안에 걸려 있는 고상한 그림과 정원에 놓인 대리석 조각상. 19세기 중반까지 사람들이 ‘슬롯 꽁 머니’ 하면 떠올리는 전형적인 이미지는 이랬다. 그만큼 슬롯 꽁 머니은 지체 높고 돈 많은 사람들의 전유물이었다.
절망 속에서 욕망을 꿈꾸던 비엔나의 슬롯 꽁 머니를 만나다
콜로만 모저 ‘산맥’(1913)
콜로만 모저 슬롯 꽁 머니;산맥’(1913)
“예술이 왜 부자들만의 것이어야 하는가. 예술은 보편적인 선(善)이고, 모든 사람의 것이다.” 빈 분리파는 이렇게 주장했다. 그래서 이들은 ‘총체예술’이라는 개념을 만들어냈다. 일상생활에서 쓰이는 흔한 잔이나 그릇, 가구도 유화나 조각 못지않은 훌륭한 예술 작품이 될 수 있다는 게 빈 분리파 작가들의 생각이었다. 이런 생각을 실현하기 위해 빈 디자인 공방을 세운 두 슬롯 꽁 머니가 빈 분리파의 공동 창립자인 모저(1868~1918)와 호프만(1870~1956)이다.

빈 응용예술학교 교수 동료이던 모저와 호프만은 스타일은 조금 달랐다. 모저가 장식적이고 회화적인 디자인을 선호했다면, 호프만은 비교적 기하학적이고 단순한 디자인을 선호했다. 세부적인 사상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모저는 더 많은 사람이 총체예술을 즐기려면 ‘가성비’도 중요하다고 봤다. 반면 호프만과 다른 빈 디자인 공방의 슬롯 꽁 머니들은 ‘예술성’이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결국 이런 의견 차이로 모저는 1907년 공방을 떠나게 된다. 그 후 모저는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전시장에서는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인상주의와 일본 목판화 양식이 반영된 그의 회화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반면 호프만의 디자인은 더욱 간결해지고 기능을 강조하는 쪽으로 진화했다.

모저는 1918년 암으로 숨을 거뒀고, 빈 디자인 공방은 대공황의 여파로 경영난을 겪다가 1932년 해체됐다. 호프만은 1956년 세상을 떠난다. 하지만 “언젠가는 사람들이 벽지, 가구 그리고 생필품까지도 슬롯 꽁 머니에게 주문하는 날이 올 것이다”(호프만)는 이들의 예견은 오늘날 현실이 됐다. 1000원짜리 식기를 살 때조차 사람들은 디자인을 유심히 살핀다. 삶 속에 디자인과 예술이 녹아든 것이다. 1900년 모저와 호프만이 빈에서 꿈꿨던 총체예술은 그 시작점이었다.
요제프 호프만 격자무늬 꽃병, 콜로만 모저 ‘꽃병’, 요제프 호프만 꽃장식 테이블 M436번.(왼쪽부터 시계방향슬롯 꽁 머니)
요제프 호프만 격자무늬 꽃병, 콜로만 모저 슬롯 꽁 머니;꽃병’, 요제프 호프만 꽃장식 테이블 M436번.(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천재들의 지독한 사랑앓이…광기 응축된 걸작을 남기다
그림도 삶도 자신에게 솔직했던 실레…가난한 연인 대신 중산층과 결혼

구스타프 클림트가 댕긴 혁신의 불씨는 그다음 세대에서 활활 타오른다. 자연이나 인물을 사실 그대로 그리지 않고 갈등과 고독, 고뇌 등 내면의 감정을 표현하는 데 집중하는 ‘표현주의’가 꽃피운 것이다. 그 주역은 리하르트 게르스틀, 오스카어 코코슈카, 에곤 실레. 작품 속 뒤틀린 붓질만큼이나 이들은 과감한 사랑을 했고 강렬한 삶을 살았다. 전시장에 걸린 작품 뒤에 숨겨진 세 천재 슬롯 꽁 머니의 이야기.

주변 사람보다 너무 앞서나간다는 게 때로 일종의 저주가 되는 경우가 있다. 게르스틀의 삶이 그랬다. 그의 재능은 탁월했다. 스무 살이 채 되기 전 자신만의 표현주의적 화풍을 만들어낼 정도였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홀로 오스트리아의 다른 슬롯 꽁 머니들을 5~10년 앞선 것이다. 전시장에 나온 ‘반신 자화상’이 대표적 사례다.

그의 작품은 동시대 미술계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앞서가다 못해 동료 슬롯 꽁 머니들이 도저히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새로웠던 화풍, 빈 분리파를 만들어낸 혁신가 클림트조차 ‘꼰대’ 취급하며 무시했던 괴팍한 성격 탓이었다.

이런 그를 이해하고 아껴준 유일한 인물이 작곡가 쇤베르크다. 쇤베르크는 게르스틀을 친동생처럼 대하며 물질적·정서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자신이 참석하는 식사나 사교 모임에 게르스틀을 자주 초대했고, 심지어 가족 휴가를 떠날 때도 게르스틀을 데려갔다.

하지만 게르스틀은 이런 쇤베르크의 아내(마틸데)와 불륜을 저지르며 은인의 뒤통수를 쳤다. 단순한 불장난이 아니어서 더 문제였다. 쇤베르크에게 불륜 관계가 발각되자 게르스틀은 마틸데에게 “새출발하자”며 청혼슬롯 꽁 머니. 하지만 마틸데는 쇤베르크의 간곡한 설득에 가족이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갔다. 당연히 게르스틀은 ‘왕따’가 됐다.

사랑에 실패하고 사회적으로 고립되면서 실의에 빠진 게르스틀은 자신의 작품을 대거 불태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순간 쇤베르크는 마틸데가 참석한 음악회에서 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몇 남지 않은 게르스틀의 작품에서 그의 천재성, 격렬하고 어두웠던 감정을 확인할 수 있다.
절망 속에서 욕망을 꿈꾸던 비엔나의 슬롯 꽁 머니를 만나다
오스카어 코코슈카 ‘피에타’(1990·왼쪽),  리하르트 게르스틀 ‘반신 자화상’(1902~1904)
오스카어 코코슈카 슬롯 꽁 머니;피에타’(1990·왼쪽), 리하르트 게르스틀 슬롯 꽁 머니;반신 자화상’(1902~1904)
코코슈카의 사랑도 게르스틀 못지않게 강렬했다. 그는 희대의 ‘팜파탈’로 불린 알마 말러를 사랑했다. 알마는 천재 작곡가 구스타프 말러를 비롯해 수많은 슬롯 꽁 머니의 마음을 사로잡은 마성의 여인이었다.

코코슈카가 일곱 살 연상의 알마를 만난 건 1912년, 26세 때였다. 코코슈카는 클림트가 “젊은 세대 화가 중 가장 위대한 재능을 지니고 있다”고 찬사를 보낼 정도로 촉망받는 화가였다. 두 사람은 보자마자 서로에게 끌렸다. 하지만 둘의 연애는 순탄하지 않았다. 사교계의 중심이던 알마는 수시로 바람을 피웠고, 코코슈카는 그런 알마에게 병적으로 집착슬롯 꽁 머니. 알마는 훗날 회고슬롯 꽁 머니. “코코슈카와 사랑했던 시간만큼 지옥과 천국을 여러 번 오간 적은 없었다.”

코코슈카는 알마와 결혼하고 싶어 했지만, 알마는 코코슈카의 질투와 집착에 점차 질려 갔다. 그러던 중 알마가 코코슈카와의 아이를 낙태하는 일이 벌어졌다. 코코슈카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갑자기 기병대에 입대해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슬롯 꽁 머니. 그사이 알마는 예전에 만났던 남자친구, 모더니즘 건축·디자인의 산실인 독일 바우하우스의 초대 교장 발터 그로피우스와 결혼해 버렸다.

전쟁에서 돌아와 그 사실을 알게 된 코코슈카의 광기가 폭발슬롯 꽁 머니. 코코슈카는 알마를 본뜬 인형을 주문 제작한 뒤 함께 식당에 가고 오페라 공연을 관람슬롯 꽁 머니. 이런 기행이 수년간 이어졌다.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는 작품에서는 그의 독특한 정신세계와 광기, 천재성을 함께 확인할 수 있다. 내면의 감정을 단번에 터뜨리는 듯한 색채와 뒤틀린 형상이 인상적이다.
절망 속에서 욕망을 꿈꾸던 비엔나의 슬롯 꽁 머니를 만나다
에곤 슬롯 꽁 머니 ‘회색 망토를 두르고 무릎을 꿇은 여성’
에곤 실레 슬롯 꽁 머니;회색 망토를 두르고 무릎을 꿇은 여성’
“그림은 잘 몰라도 실레가 천재라는 사실은 알겠다.” 실레의 그림을 직접 본 이들 중에서는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 유독 많다. 그만큼 그의 화풍은 독창적이고, 척 봐도 슬롯 꽁 머니;이건 실레의 그림’이라고 알아볼 만큼 특징적이다. 그 매력은 실레의 질풍 같은 삶에서 자라났다.

매독을 앓은 아버지는 실레가 15세 때 세상을 떠났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했던 어머니는 실레에게 따뜻하게 대해주지 못슬롯 꽁 머니. 부모로부터 애정을 받지 못한 탓에 실레는 남들보다 더 격렬한 사춘기를 겪었다. 한편 실레는 10대 때 이미 대가 수준의 그림 실력을 갖춘 미술 천재였다. 그 탁월한 실력으로 실레는 자신의 불안한 내면과 성적 충동을 화폭에 그대로 옮겼다.

적나라한 묘사 때문에 그의 작품은 “그림이 아니라 외설”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슬롯 꽁 머니. 하지만 그만큼 실레는 자신에게 솔직했고, 자신이 느끼는 모든 것을 자신만의 색채와 선으로 그려냈다.

모델인 발리 노이칠과 동거하던 그는 안정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이유로 연인을 버리고 중산층 집안의 딸 에디트 하름스와 결혼슬롯 꽁 머니. 이 시기 독일과 스위스, 체코 등에서 연 전시회가 크게 성공을 거두면서 실레의 명성도 점차 높아지기 시작한다. 그렇게 안정과 성공이 찾아오려는 찰나, 유럽에서 총 2000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스페인 독감이 빈을 덮쳤다. 그 희생자 중 하나가 실레였다.

불과 2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난 실레는 짧은 삶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남긴 이 말을 현실로 만들었다. “모든 아름답고 고귀한 자질은 내 안에 있다. 나는 썩어도 영원한 생명력을 남길 열매가 될 것이다.”

김보라/성수영 기자 destinybr@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