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연말이면 생각나는 오페라가 있다. 올해로 100주기가 되는 ‘선율의 마술사’ 자코모 푸치니(1858~1924)가 남긴 가장 로맨틱 오페라 <라 보엠이다.

<라 보엠은 프랑스 파리의 대학가 라틴 지구에 모여 사는 네 명의 젊은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그려낸 오페라다. 가난하지만 저마다의 가슴 속에 푸른 희망을 품고 사는 청춘들의 우정과 사랑, 열정과 방황의 이야기가 푸치니의 유려한 선율 속에 참으로 아름답고 가슴 시리게 펼쳐진다.



오페라의 1, 2막은 때마침 크리스마스 이브가 배경이다. 가난한 시인 로돌포는 촛불을 빌리러 온 이웃집 처녀 미미와 우연히 마주친다. 그녀의 청초한 모습에 반한 그는 미미의 얼음장처럼 차가운 손을 붙잡고는 이 세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사랑 고백을 절절히 쏟아낸다. 유명한 테너 아리아 ‘그대의 찬 손 Che gelida manina’이다. “저는 시인입니다. 생활은 곤궁하지만, 시와 노래의 아름다운 파라다이스에 둘러싸여 행복하지요. 그렇습니다. 마음만은 진정 백만장자인 것입니다.”
푸치니의 가장 로맨틱 카지노 꽁 머니, 빛바랜 엽서 같은 <라 보엠
이에 미미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화답하는데, 아름답고 서정적인 소프라노 아리아의 대명사 ‘내 이름은 미미 Si, mi chiamano Mimi’다. “제 이름은 미미라고 해요. 저는 삯바느질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요. 혼자 사는 다락방에서는 파리의 높은 지붕만이 보일 뿐이지만, 봄의 첫 햇살과 4월의 첫 키스는 바로 제 차지랍니다.” 청춘의 남녀가 주고받는 황홀하고 숨 막히는 사랑 고백에 이어, 교교한 달빛이 내려앉은 작은 다락방 위로 테너와 소프라노의 찬란한 사랑의 2중창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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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보엠 미미 역을 위한 의상 디자인(1896)
2막에서는 또 하나의 커플이 탄생한다. 왈가닥 아가씨 무제타와 화가 마르첼로가 파리의 카페 모무스에서 다시 재회한 것이다. 무제타는 마르첼로를 쳐다보며 은근히 그의 질투심을 유발하는 노래를 부르니, 바로 ‘무제타의 왈츠 Quando m'en vo’다. “내가 길거리를 걸어가면 모든 남자가 다 나를 바라봐. 난 남자들의 뜨거운 시선을 받고 살아가는 그런 인기 만점의 여자야!” 무제타의 도발에 마르첼로는 버럭 화를 내지만 곧 그녀가 아직도 자신에게 애정이 남아있다는 걸 알아챈다.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두 사람은 뜨겁게 재회하고, 그들의 사랑을 크리스마스 이브의 들뜬 분위기가 축복해 준다.

3막이 되면 이미 시간은 겨울의 끝자락인 2월이다. 로돌포와 미미, 무제타와 마르첼로 두 커플의 풋풋하지만, 열정적인 사랑은 ‘가난’이라는 현실적인 장벽에 부딪히고 결국 이들 모두 가슴 아픈 이별을 경험하게 된다. 마지막 4막은 다시 찾아온 봄이다. 한동안 소식이 끊겼던 미미가 돌아오지만 이미 건강을 해쳐 빈사 상태가 되어 있다. 미미는 죽어가면서도 로돌포의 손을 꼭 잡으며 아름다운 사랑의 밀어를 속삭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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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보엠 3막 장면으로 만들어진 광고(1895). / 사진출처. 위키피디아
푸치니는 전통적인 막(act) 개념 대신 ‘정경’ 혹은 ‘장면’이라 불리는 이탈리아어 콰드로(quadro)를 써가며 이 오페라를 네 장면으로 나눴다. 그것은 이 작품이 기승전결을 지닌 극적인 드라마라기보다는, 마치 지난 시절의 빛바랜 엽서를 다시 보듯 아련한 노스탤지어로 가득 찬 ‘청춘 스케치’라는 의미일 것이다. 2024년을 마무리하는 올해 12월에도 오페라 <라 보엠과 함께 한없이 아련한 낭만에 빠져보자.

황지원 오페라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