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마을] 현대인 마음속에 남아 있는 1970년대 슬롯사이트 투기 욕망

슬롯사이트 시대

유승훈 지음 / 생각의힘
392쪽│2만2000원
1970년대 서울에 부동산 광풍이 불었다. ‘슬롯사이트’이란 말도 그때 탄생했다. 학력이 높고 경제적으로 상층에 속하는 30~40대 여성으로, 복덕방을 드나들며 투자 목적으로 아파트를 사들였다.

부산근현대역사관에서 일하는 민속학자 유승훈은 최근 펴낸 <서울 시대에서 “광풍처럼 서울을 휩쓸고 간 복부인과 복덕방의 풍속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 지금까지 여진처럼 존재한다”며 “복부인을 욕하던 사람들도 슬롯사이트 욕망을 내재화했고, 서울 사람들의 투기 심리는 보편화됐다”고 했다.1972년 슬롯사이트에서는 100만 가구 가운데 4%만 아파트에 살았다. 아파트는 좁았고 날림 공사로 이미지가 그리 좋지 않았다. 당시 이촌동에 들어선 한강맨션은 아파트도 고급스러울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젊은 주부들이 좋아했다. 거실, 부엌, 목욕탕, 화장실, 침실이 한 공간에 있어 이동이 편했고, 집을 관리하기도 수월했다.

그런 가운데 주택 부족, 강남 재개발 등이 겹쳐 집값이 폭등하자 투기 열풍이 불었다. 당첨만 되면 손쉽게 돈을 벌 수 있었다. 당시 언론은 이렇게 묘사했다. “슬롯사이트은 혼자만이 아니고 가족들을 이끌고 다녔다. 시아버지, 시동생까지 이끌고 아파트 청약 창구를 흥분해서 돌아다녔다.”

입주하지 않고 프리미엄을 얹어 파는 전매가 횡행했다. 잠실 한 고층 아파트는 15회 전매됐다. 법적으로 전매는 1년간 금지였다. 하지만 집을 등기하지 않은 상태에서 전매하는 방법으로 같은 집이 하루에도 여섯 번 사고팔렸다.복방이 이를 부추겼다. 가공의 인물을 매수자로 내세워 가격을 올리기도 했고, 슬롯사이트 단골들로 원정대를 꾸려 지방을 돌아다니기도 했다. 가격을 올린 뒤 마지막에는 순진한 지역민에게 물건을 떠넘겨 피해를 줬다.

특수분양이란 명목으로 권력가 등에게 아파트를 상납하는 일도 빈번했다. 이들은 슬롯사이트처럼 열심히 청약에 뛰어들 필요가 없었다. 간단히 아파트를 당첨받아 프리미엄을 받고 팔았다. 1978년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특혜 분양 사건이 대대적으로 보도됐지만 검찰 수사는 졸속으로 끝났다. 대신 투기꾼이 정부의 타깃이 되며 슬롯사이트은 사라졌다.

서울 시대란 제목처럼 1960~1990년대 다양한 서울의 풍속을 다룬다. 새벽부터 밤까지 만원 버스에서 중노동한 버스 안내양, 전교생이 한자리에 모이는 것이 불가능하던 콩나물 교실, 도떼기시장 같던 결혼식장 등이 생생한 모습으로 책 슬롯사이트 펼쳐진다.

임근호 기자 eige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