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품 슬롯사이트 실로 그린다… 산과 구름의 산수화도, 낯설고 섬뜩한 추상화도

[arte] 홍지수의 공예 완상

실을 엮고, 꼬고, 감고, 짜서 그린 그림
정품 슬롯사이트(tapestry)

기원전 5000년경 그리스 로마 시대에
주로 왕궁, 신전 등에서 장식, 공예품으로 사용했던 것이 기원

동시대 미술에서는 회화, 조각과 다른 미적 경험 및 영감 제공
코로나가 정점이던 2020년, 바티칸 박물관(Musei Vaticani)은 라파엘로 사후 500주기를 맞이해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 da Urbino, 1483-1520)의 정품 슬롯사이트(직물 공예) 12점을 미켈란젤로가 그린 ‘천지창조’의 회랑 벽에 걸었다. 일주일 남짓 짧은 기간이었지만 코로나였기에 가능한 전시였다. 지금 벽에는 미켈란젤로가 그린 벽화만 볼 수 있지만. 5세기 전 이 벽에는 라파엘로의 정품 슬롯사이트가 걸려 있었다.[1]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에 걸린 라파엘로의 정품 슬롯사이트 / 제공. 홍지수
라파엘로의 정품 슬롯사이트는 제자들이 그린 밑그림을 바탕으로 장인들이 직물을 짜 완성한 작품이다. 성경 내 예수의 기적과 사도들의 행적을 수놓았다. 날실을 수직기에 걸고 한줄 한줄 색과 순서에 따라 색실을 씨실로 적층하여 만든 화면이지만 어떤 회화보다도 실감 나는 섬세한 묘사와 아름다운 색채, 서사가 돋보인다. 정품 슬롯사이트를 차가운 돌벽의 바람과 습기를 막는 가림막, 커튼, 카페트 등으로만 생각하던 사람들에게는 회화에 준하는 세밀한 묘사와 아름다운 색채, 뛰어난 직조 기술이 새롭고 놀라울 것이다.정품 슬롯사이트(tapestry)의 기원은 기원전 5000년경 그리스, 로마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주로 왕궁이나 신전 등 중요한 장소에 장식, 공예품으로 사용했다.

중세 가장 유명한 정품 슬롯사이트는 11세기에 제작한 프랑스의 바이외(Bayeux) 정품 슬롯사이트다. 폭 50cm에 길이 70m 거대한 화면에 중세 시대의 영주 윌리엄의 승리가 실감 나게 묘사되어 있다.

17세기 유럽에서는 르네상스 군주와 귀족들의 정품 슬롯사이트 수집이 유행했다. 플랑드르산 정품 슬롯사이트를 수집하거나 제작 의뢰했던 프랑스 왕실은 직접 고블랭 제작소(Manufacture des Gobelins)를 설립하고 정품 슬롯사이트를 직영 생산했다. 18세기 정품 슬롯사이트의 인기는 귀족들로 확대되었는데 벽걸이용뿐 아니라 방 전체를 정품 슬롯사이트로 꾸밀 만큼 유행했다. 현재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전시 중인 크룸 코트(Croome Court)의 정품 슬롯사이트 룸이 해당한다.
크룸 코트의 정품 슬롯사이트 룸(1763-1771년), 메트로폴리탄미술관, 뉴욕 / 제공. 홍지수
오늘날 정품 슬롯사이트는 동시대 미술의 차원에서 회화, 조각과는 다른 미적 경험과 영감을 주는 조형 예술이다. 현대 섬유 예술가들은 양모, 실크 등 천연 소재뿐 아니라 플라스틱, 금속, 유리 등 다양한 소재를 사용한다. 고전 회화나 전통 정품 슬롯사이트와 다른 감각과 의미를 유발한다. 정품 슬롯사이트가 오래전부터 사회, 정치, 문화적 상황뿐 아니라 당대 생활양식과 가치관을 담아온 점에 착안해, 현대사회의 첨예한 정치, 사회, 젠더 이슈들을 소재로 담기도 한다. 때로는 거대서사보다 작가 자신의 소소한 삶과 생각을 미시의 눈으로 살피고 시도하는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성향이 현대 정품 슬롯사이트에서 엿보이기도 한다.

한국에 서구 정품 슬롯사이트가 소개, 도입된 것은 1960년대다. 섬유 예술의 전성기인 1960~70년대 염색과 더불어 직조 작업이 활발해지면서 현대 회화에 준하는 정품 슬롯사이트 표현들이 등장했다. 한국 섬유 예술 1세대 이신자(1930- )는 국내 섬유 예술이라는 어휘조차 없던 시절 ‘정품 슬롯사이트’를 국내에 소개한 효시 역할을 했다.

2023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는 <이신자, 실로 그리다을 열어 1960년대부터 제작한 다수의 정품 슬롯사이트, 드로잉, 자료 등을 전시했다. 자수, 직물, 염색 등 특정 재료, 기법에 매진하는 것을 중요시했던 기존 섬유 공예와 달리 밀포대, 방충망, 벽지, 종이 등 다양한 섬유 재료를 사용하면서 정품 슬롯사이트의 단조로움을 극복하고 독특한 재질감과 입체적 표현을 만들었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정품 슬롯사이트;lt;이신자, 실로 그리다정품 슬롯사이트;gt;에서 이신자 작가가 본인의 작품을 소개하고 있다 ⓒ 연합뉴스
19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정품 슬롯사이트와 판화, 콜라주 등 타 매체를 섞는 실험적인 시도들이 펼쳐졌다. 1980년대와 90년대 해외 유학한 이들이 국내에 해외 섬유 예술의 신재료와 기법을 국내에 소개하면서 한국 정품 슬롯사이트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다. 지금은 재료와 기법의 실험성을 극대화하고 영역을 확대하는 동시에 동시대 미술의 예술적, 창조적 동시성(synchronism)과 호흡을 같이하며 공예와 순수 미술의 범주를 아우르고 있다.

새로운 디지털 기술이 빠르게 쏟아지는 시대에 예술 영역 및 수공성의 변화에 대한 고민을 첨단 미디어, 재료의 접목으로 시도하기도 하고, 소리, 영상, 빛과 정품 슬롯사이트를 결합하기도 한다. 근래 국제적 분쟁과 코로나 팬데믹을 겪으며 사회적 현상과 개인의 변화를 연관 지어 섬유 공예의 언어와 사회적 실천으로 견인하기도 한다.

2024 베네치아 비엔날레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마타호 컬렉티브(Mataaho Collective)의 대규모 섬유 설치 ‘타카파우(Takapau)’를 비롯해, 붉은 실을 소재로 설치미술, 조각, 디지털아트, 최근 인공지능까지 섭렵해 설치 미술 NFT로 작업한 준케이(June K), 인간성에 대한 보편적 장소에 고통, 관계를 상징하는 실을 거미줄처럼 엮고 채워 환각의 풍경을 연출한 치하루 시오타(Chiharu Shiota)까지 ‘실’을 소재로 사용하는 예술가들의 목적이 다르지 않다.최근 젊은 섬유 예술 작가들의 정품 슬롯사이트에서는 공예와 현대 미술을 동시에 아우르는 다양한 표현과 실험성이 엿보인다. 섬유 예술가 김민선은 나무의 나이테, 거피(去皮), 그루터기 등을 모티브로 패턴을 디자인한다. 디지털 방식으로 방직한다. 실로 짠 나무의 겉 무늬인데 생의 사라진 식물 혹은 동물의 피죽을 벗겨 펼쳐 놓은 듯 낯섦과 섬뜩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가까이 다가가 보면 가볍게 스쳐 지나갈 때는 보지 못했던 식물의 표면이 이토록 유기적이고 리드미컬했던가 달리 보인다.
[위] 김민선 정품 슬롯사이트;lt;Tree Ⅰ, Ⅱ정품 슬롯사이트;gt;(2021), 직조면직물, 헴프린넨, 비스코스 [아래] 김민선 정품 슬롯사이트;lt;나무의 허물정품 슬롯사이트;gt;(2023), 헴프로 만든 부드러운 조각, 20×60×33cm / 사진. ©김민선
김태연의 정품 슬롯사이트 재료는 포장지, 줄자, 스카치테이프, 비닐 등이다. 엮고, 감고, 짜는 것이 가능하다면 일상의 모든 것이 재료다. 색, 물성, 질감, 강도가 다른 재료를 잇다 보면 이것이 물질을 잇는 것이 아니라 연결점을 찾고 새로운 관계를 만드는 일이라는 생각에 이른다. 성질 다른 재료와 재료를 잇고 완성하는 것은 생각 다른 사람과 사람이 함께 어울려 사는 것과 다르지 않다. 작가가 홀로 작업하지 않고 관객을 참여시켜 공동 정품 슬롯사이트를 완성하거나 사람들이 사용하던 물건을 새롭게 수선해 사물의 ‘재생’과 ‘영속성’을 묻는 것 역시 보기는 달라도 관계를 묻는 예술가의 시도이다.
[차례대로] 김태연 정품 슬롯사이트;lt;틀-넘나들다정품 슬롯사이트;gt;(2021), 갤러리인사이트, 설치 전경과 작품 세부 / 사진. ©김태연
[좌] 김태연 &lt;틀-넘나들다&gt;(2021), 설치, 갤러리인사이트 [우] 비닐, 노끈, 종이 등 일상의 모든 것이 김태연의 정품 슬롯사이트 재료이다 / 사진. ©김태연
차승언의 직조 회화는 눈으로 보기에 한지에 먹으로 그린 수묵화나 추상회화 같다. 화면에 눈을 가까이하면 무엇처럼 이미지는 걷히고 촘촘한 올과 결로 교차해 엮인 직물의 단면만 보인다. 작가가 어떻게 짜임방식을 달리했는지에 따라 우리가 표면에서 보고 느끼는 바가 다르다. 회화는 프레임을 직물로 표면을 감싼 후 붓질로 그린 평면 위 가상이다.

차승언의 정품 슬롯사이트는 의도 없이 직조기에 걸고 짠 날실과 씨실의 교차와 비움, 실의 물성이 곧 이미지다. 실은 물감과 달라 굵기도, 색도, 밀도도 균질하지 않다. 예상치 않은 맺음이나 얼룩이 생기기도 한다. 그것이 우리 눈에 산으로, 구름으로, 물처럼 보이며 산수화로, 추상화로 인식하는 것이다.
차승언 정품 슬롯사이트;lt;능직얼룩 (TwillStain) 19, 21, 20정품 슬롯사이트;gt;(2018) 230×97cm×3, 면사, 합성사, 염료 / 사진. ©차승언
눈으로 보고 인식하는 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얼마나 위태롭고 유약한가? 많은 작가들이 캔버스 직물 위에 수만번 붓질로, 물감의 고임과 흘림의 자국으로 그리고 원근법으로 이 세상 어딘가에 있을 법한 그리고 한 번도 보지 못했지만 반드시 존재한다고 믿는 것을 그려왔다. 차승언은 붓질, 물감의 얼룩 대신 정품 슬롯사이트의 수평, 수직선, 염(染)의 얼룩, 두껍다가 점점 얇아지고 실의 두께와 부피의 강약으로 우리의 시각과 인식을 질문하고 있다.
[좌] 차승언 정품 슬롯사이트;lt;능직얼룩 (TwillStain) 9정품 슬롯사이트;gt;(2017), 97×162cm, 면사, 합성사, 염료 [우] 정품 슬롯사이트;lt;능직얼룩 (TwillStain) 9정품 슬롯사이트;gt; 작품 세부 / 사진. ©차승언
홍지수 공예평론가•미술학박사•CraftMIX 대표



[1] 그동안 라파엘로의 정품 슬롯사이트가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 데는 교황 레오 10세(재임 1513-1521)의 요청으로 제작된 후 손상 방지를 위해 일반에 공개하지 않아서다. 과거 몇 차례 전시했지만, 다른 공간에서 짧은 시간, 몇 점만 공개되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