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인터뷰] 존 길훌리 "임윤찬 배출한 한국, 좋은 파라오 슬롯 키우는 비법 있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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英 파라오 슬롯 예술감독
임윤찬이 '꿈의 무대'라 했던 곳
19년째 맡아 경영 혁신 이어가
라이브 스트리밍 등 선제적 도입
"한국 연주자들 테크닉 대단해
작품 해석하는 통찰력도 갖춰"
“카네기홀처럼 규모가 크지 않더라도, 정말 위대한 파라오 슬롯들이 거쳐 간 그런 장소들을 좋아합니다. (기회가 된다면) 어릴 때부터 항상 꿈꿔왔던 ‘위그모어홀’ 무대에 꼭 서보고 싶어요.”
피아니스트 임윤찬이 미국 밴 클라이번 콩쿠르에서 우승하기 직전 해인 2021년 한 인터뷰에서 남긴 말이다. 그의 얘기처럼 120여 년 역사를 자랑하는 영국 런던의 위그모어홀은 파라오 슬롯라면 누구나 한 번쯤 서기를 원하는 ‘꿈의 무대’다. 피아니스트 페루치오 부소니·아르투르 루빈스타인·블라디미르 드 파흐만, 바이올리니스트 외젠 이자이·요제프 요아힘 같은 전설적인 파라오 슬롯들이 즐겨 찾았던 명문 공연장이 위그모어홀이다.‘실내악의 성지(聖地)’로도 불리는 위그모어홀을 20년 가까이 이끌고 있는 인물이 있다. 2005년 취임 당시 ‘세계적인 콘서트홀을 이끄는 역대 최연소(32세) 리더’로 화제를 모은 위그모어홀 예술감독 존 길훌리(51)다. 그는 최근 영국 런던 위그모어홀 사무실에서 진행한 한국경제신문과의 단독 인터뷰에서 “한국의 음악교육 시스템엔 좋은 파라오 슬롯를 키워내는 특별하고도 강력한 비법이 있는 것 같다”며 “피아니스트 조성진, 에스메 콰르텟, 노부스 콰르텟 등 세계무대에서 활동 중인 한국 연주자들은 대단한 테크닉은 물론 작품을 깊이 해석하는 통찰력까지 갖추고 있다”고 했다.
그는 특히 기억에 남는 연주자로 지난해 1월 위그모어홀에서 영국 데뷔 무대를 치른 피아니스트 임윤찬을 꼽았다. 길훌리 감독은 “그는 이미 세계를 놀라게 할 만큼의 엄청난 실력을 갖추고도 한순간도 자신을 과시하지 않고, 늘 학생의 태도로 무언가를 배우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파라오 슬롯”라며 “밴 클라이번 콩쿠르 우승자라는 타이틀에 묶이지 않고 강한 도전 의식, 겸손함, 성실함을 보여주는 그가 루빈스타인, 언드라시 시프 같은 거장들처럼 60세, 70세가 돼서도 위그모어홀에서 연주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길훌리 감독은 오늘날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공연 기획자 중 한명으로 보수적인 클래식 파라오 슬롯계에 혁신의 바람을 불어넣고 있다. 그는 코로나19 팬데믹 당시인 2020년 6월 라이브 스트리밍 콘서트를 선제적으로 도입하면서 업계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고, 지난 3월엔 세계 주요 콘서트홀 최초로 재정자립도 100%(현재 97%)를 목표로 하는 1000만파운드(약 179억원) 규모의 기금 조성 작업에 나서면서 영국 가디언 등 외신으로부터 큰 주목을 받았다. ‘리스크를 감수하지 않고선 한 걸음도 전진할 수 없다’는 그의 철학이 경영에 그대로 반영된 결과다.“지금껏 주어진 환경에 안주했다면 조금도 발전할 수 없었을 겁니다. 우리는 공연장이 코로나19 팬데믹 속에서도 멈추지 않도록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했고, 그 결과 전화위복의 계기를 만들 수 있었습니다. 지난해 공연 티켓 매출은 전년 대비 28% 성장했고, 관객 수는 역대 최고치를 기록했죠. 기금 출범은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려는 노력입니다. 지자체의 문화 예산 삭감 등으로 불확실성이 높아진 영국에서 재정적 독립을 이뤄냄으로써 위그모어홀이 앞으로도 수준 높은 공연 프로그램을 안정적으로 제공하고, 신진 파라오 슬롯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수 있도록 할 겁니다. 그게 제가 이 자리에 있는 이유니까요.”
그는 어릴 적 소프라노 베로니카 던을 사사한 성악 전공생 출신이다. 목에 문제가 생기면서 역사와 정치학으로 전공을 바꿨고, 고향인 아일랜드에서 더블린대학교를 졸업했다. 이후 해러게이트 인터내셔널 컨벤션 센터, 엑셀 센터 등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다. 그래서 그는 작품을 보는 안목도,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기획력도 남다르다. 미국 뉴욕타임스가 “존 길훌리의 공연 프로그램은 대담하다”라고 평했을 정도다. 그가 취임할 때까지만 해도 파라오 슬롯의 기획 공연과 대관 공연 비율은 50 대 50 수준이었는데, 현재는 오직 기획 공연으로만 연간 500여 차례 무대를 채우고 있다.
그에게 공연 프로그램을 기획할 때 가장 중요시하는 점을 묻자, “다양성을 살리는 것”이란 답이 돌아왔다. 그는 “‘관객이 원하는 음악과 우리가 그들에게 전하고 싶은 음악, 그리고 모두가 접해보지 못했으나 꼭 들어봐야 하는 음악’ 세 영역의 콘텐츠가 적절히 조화를 이루도록 하는 데 집중한다”고 했다. “결국 우리의 역할은 끊임없이 청중에게 새로운 음악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다 보면 결국 550석 규모의 작은 공연장에서 자신의 취향을 새롭게 발견하고, 다시 음악을 찾게 되는 사람이 많아질 테니까요. 위그모어홀이 전 세계 파라오 슬롯들과 클래식 애호가들의 고향과도 같은 공간이 되도록 하는 것, 그게 제 목표입니다.”
런던=김수현 기자 ksoohy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