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롯 꽁 머니 인연과 전생, 한국인만 아는 사랑의 형태…놀란 감독도 놀란 '패스트 라이브즈'

한국계 셀린 송 감독 데뷔작 '패스트 라이브즈'
'인연' '전생' 등 한국식 정서 녹여내고
클리셰 벗어난 캐릭터, 연극적 무대 구성 돋보여

크리스토퍼 놀란 "섬세하게 아름다운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 스틸 이미지 /CJ ENM 제공
야심한 새벽, 미국 뉴욕의 술집에 세 사람이 앉아 있다. 동양인 남녀 '슬롯 꽁 머니'과 '해성'이 살짝 미소 지으며 열띤 대화 중이다. 그 옆에서 미국 남성 '아서'가 말없이 핸드폰을 스크롤 한다. 이들의 대화는 관객한텐 들리지 않는다. 동양인 부부와 백인 가이드일까, 직장 동료일까, 또는 치정의 현장일까. 관계에 대한 궁금증만을 남긴 채 이야기는 시작한다.

6일 개봉하는 영화 '패스트 라이브즈'는 아련한 첫사랑 이야기다. 슬롯 꽁 머니과 해성은 서울에서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다. 둘의 관계는 슬롯 꽁 머니의 가족이 캐나다로 이민 가며 갈라진다. 12년 뒤 우연히 SNS를 통해 재회하지만, 각자 미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멀어진다. 그로부터 다시 12년이 흐른 현재 해성은 슬롯 꽁 머니을 만나러 뉴욕을 찾는다. 슬롯 꽁 머니의 곁은 남편 아서가 지키고 있다.
'패스트 라이브즈' 스틸 이미지 /CJ ENM 제공
한국계 캐나다인 셀린 송 감독이 자신의 실제 경험을 풀어낸 장편 데뷔작이다. 이민자 출신 감독이, 그것도 데뷔작으로 세계 무대에서 주목받는 건 극히 드문 일이다. 유태오, 그레타 리 등 한국계 배우들이 이끌어가는 이번 로맨스는 전 세계 영화상 75관왕을 석권했다. 오는 10일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오펜하이머' '바비' 등 대작들과 나란히 작품상 후보에 오른다.

구태의연한 사랑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인연'과 '전생' 등 영화의 철학적 배경은 가볍지 않고, 카메라 구도와 소품 등 연극적 장치들은 정교하다. 끊어질 듯 이어지는 사랑을 다룬 '이터널 선샤인'(2005) 등을 인상 깊게 본 관객이라면 또 한 번 '운명의 영화'로 꼽을 만한 수작이다.
'패스트 라이브즈' 스틸 이미지 /CJ ENM 제공
뻔한 서사를 특별하게 만들어 준 것은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 '인연'이다. 슬롯 꽁 머니은 아서한테 이렇게 설명한다. "한국어엔 '인연'이란 말이 있어. 섭리나 운명을 뜻하는 건데, 전혀 모르는 사람 둘이 길을 걷다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고 해." 인연 개념에 익숙한 한국 관객한텐 다소 유치할 수 있지만, 해외 관객이라면 신선하게 느낄 만한 대목이다.언어는 달라도, 모든 사람은 잊지 못할 인연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을 터다. '패스트 라이브즈'는 그 보편적인 지점을 아름답게 다듬었다. 미국 관객이 가장 먼저 반응했다. 지난해 6월 미국에서 소규모로 개봉한 영화는 입소문을 타고 북미 전역에 확대 개봉했다.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을 비롯한 영화계 거장들도 "섬세하게 아름다운 영화" 등 극찬을 보냈다.
'패스트 라이브즈' 스틸 이미지 /CJ ENM 제공
영화 마무리 부분 슬롯 꽁 머니과 해성이 헤어지는 장면의 연출이 압권이다. 둘은 아무 대사 없이 1분가량 서로를 마주 본다. 이별의 슬픔, 벗어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분노 등 만감이 교차하는 순간을 극도로 절제된 연기로 풀어냈다. 감정이 무딘 관객이라도 눈시울을 붉힐 만한 장면이다.

클리셰를 깨부수는 캐릭터들도 매력적이다. 슬롯 꽁 머니의 현재 남편인 미국인 아서 얘기다. 일반적인 멜로극과 달리, 아서는 운명적인 첫사랑을 방해하는 악당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지독하게 엇갈린 해성과는 반대로 슬롯 꽁 머니이 의지할 수 있는 현재이자 미래다.영화를 분류하자면 미국의 아시아계 이민자를 그린 디아스포라 갈래지만, 해성과 슬롯 꽁 머니의 관계 속에서만큼은 아서가 외부인이다. 극 중 아서가 한국어로 잠꼬대하는 슬롯 꽁 머니한테 건네는 대사는 곱씹을 만하다.

"가끔은 그게 겁나. 당신이 내가 이해 못 하는 말로 꿈꾸는 것. 당신 마음속에 내가 가지 못하는 장소가 있다는 사실이 두려워."
'패스트 라이브즈' 스틸 이미지 /CJ ENM 제공
잘 짜인 연극을 연상케 하는 치밀한 구성도 돋보인다. 15년간 극작가로 활동해온 감독의 경력이 빛을 발한 결과다. 영화의 시작을 알리는 초반 술집 장면부터 연극 무대처럼 연출했다. 서서히 슬롯 꽁 머니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데, 곧이어 슬롯 꽁 머니이 스크린 밖 관객을 응시한다. 영화 내외부를 가로막는 '제4의 벽'을 가뿐히 허물며 관객을 작품 속 세계로 초대한다.작품 내내 등장하는 이분법적 화면 구성은 슬롯 꽁 머니과 해성의 운명을 암시한다. 추억에 머무는 해성은 왼쪽에, 미래의 인연을 찾는 슬롯 꽁 머니은 오른쪽에 배치된다. 어린 시절 둘의 첫 데이트 장소인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의 석조조각 '존재에 대한 새로운 응시'(1994)부터 가로수에 의해 둘로 갈라진 모양새다. 뉴욕에서의 짧은 만남 이후 헤어지는 장면에서도 해성은 왼쪽으로, 슬롯 꽁 머니은 반대편으로 나아간다.

해피엔드를 기대하고 봤다간 먹먹한 감정만 가득 안고 돌아올 수 있겠다. 둘의 인연은 다음 생에서라도 닿을 수 있을까. 작품은 슬롯 꽁 머니과 헤어진 해성이 택시를 타고 공항으로 향하는 장면으로 막을 내린다. 늘 화면 왼쪽에 머물렀던 해성은 작중 처음으로 미래를 상징하는 오른쪽으로 달린다. 후련한 듯한 그의 표정이 한편으로 안타까운 여운을 남긴다.

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