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 바카라 거장' 박서보 별세…끝까지 한줄 더 긋다 떠났다

한국 추상사설 바카라 대표하는
사설 바카라 1세대 거장 박서보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
영면에 들다
사진=김범준 기자
사설 바카라 거장 박서보 화백이 별세했다. 향년 92세.

그는 지난 2월 SNS를 통해 “폐암 3기 판정을 받았다. 작업에 전념하며 더 의미 있게 시간을 보낼 것이다. 아직 그리고 싶은 것들이 남았다”고 밝힌 뒤 최근까지도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해왔다. 지난 8월에는 신작을 그리는 사진과 함께 “이 나이에도 시행착오를 겪는다. 했던 작업을 물감으로 덮고 다시 그으며 차츰 길을 찾아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지난 8월 박서보 화백이 SNS에 올린 작업 사진. /인스타그램
고인은 한국 추상사설 바카라과 단색화를 대표하는 작가이자 최고 인기 작가로, 후학과 사회를 위한 기부를 아끼지 않는 ‘사설 바카라계 큰 어른’으로 평가받아왔다. 1950년대 국내 주요 추상사설 바카라 운동에 참여했고, 1960년대부터 연필로 도를 닦듯 끊임없이 반복적으로 선을 긋는 ‘묘법’ 시리즈를 제작하며 독자적인 작품세계를 개척했다.

그가 개척한 단색화는 ‘물감을 쌓고 뜯어내고 점을 찍는 등 작가의 신체를 이용해(촉각성) 반복적인 작업(행위성)을 하고, 이를 통해 정신을 수양하고 탐구하는(정신성)’ 사설 바카라로 정의된다. 도공이 물레를 돌리고 석공이 돌을 자르듯 묵묵히 수행하는, 한국적 정신이 담겼다는 게 세계 사설 바카라계의 평가다.

지난해 본지와의 인터뷰에서 고인은 묘법의 개념을 떠올렸을 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좋은 예술이란 과연 뭘까, 그 답을 내 안에서 찾으려고 엄청나게 노력하고 있었어. 그런데 어느날 네 살배기 둘째가 형이 글씨를 쓰는 걸 보고 흉내를 내더라고. 방안지 칸에 글자를 적으려는데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거야. 제풀에 화가 나서 종이에 마구 연필을 휘갈기더라고. 이게 바로 체념의 몸짓이구나, ‘비움’이구나 싶었어.”
박서보 ‘묘법(Ecriture) No43-78-79-8
박 화백은 생전 “단색화는 서양 사설 바카라계에 없었던 ‘수렴의 사설 바카라’”이라고 강조해왔다. 선비가 사군자를 치는 것처럼 동양에서 예술은 수신(修身)의 수단이었고, 그래서 자신을 표현해 내보이는 ‘발산의 사설 바카라’인 서양 사설 바카라과 전혀 다른 매력이 있다는 설명이었다. 박 화백은 인터뷰에서 “단색화를 통해 보는 이의 고통과 번뇌를 빨아들이고 싶다”며 “이를 위해 색에 정신의 깊이를 담고 있다”고 말했다.

오랫동안 ‘안 팔리는’ 화가였다. 2000년대만 해도 고인의 작품 경매 낙찰가는 3000만원대를 맴돌았다. 2015년 이탈리아 베네치아 비엔날레 병행전시로 열린 ‘사설 바카라’전이 주목을 받으면서 본격적으로 빛을 봤다. 그는 본지 인터뷰에서 “그림이 안 팔려도 ‘반드시 내 시대가 온다. 지금 세상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뿐이다’고 확신하면서 죽자사자 그렸다”고 회고했다. 1976년작 ‘№ 37-75-76’은 2018년 홍콩 크리스티경매에서 200만달러(약 25억원, 낙찰수수료 포함)에 팔리며 최고가 기록을 썼다.

지난 10년간 세계 사설 바카라계에서 한국 단색화의 예술적 가치가 조명된 데에는 박 화백의 역할이 컸다는 평가다. 이제 단색화는 한국을 대표하는 사설 바카라 장르이자 하나의 고유명사가 됐다. 세계 사설 바카라계 어디서나 한국 사설 바카라 하면 ‘Dansaekhwa’(단색화)를 말할 정도다.
박서보_Ecriture (描法) No 060910-08
2019년 국립현대사설 바카라관은 박 화백의 회고전을 열며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라는 전시 제목을 달았다. 지난해 베네치아비엔날레 전시를 준비하다가 과로로 쓰러져 바닥에 얼굴을 찧는 등 온갖 고생을 하면서도 결코 붓을 놓지 않고 작업을 마무리했다. 본지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아직도 할 일은 많은데 해는 저물어 갑니다. 저물라면 저물어야죠. 하지만 나는 나대로 인공조명을 비춰서라도 끝까지 내 할 일을 하겠습니다.”

그렇게 생의 마지막까지 선을 긋던 박 화백은 14일 마침내 수행을 마치고 영면에 들었다.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될 예정이다.

성수영 기자 syoung@hankyung.com